[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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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44)
배위량 탐구와 연구를 위한 길 위에서의 변명(辨明)과 회오(悔悟) <1>

필자는 배위량(William M. Baird, 裵偉良)이란 인물을 잘 몰랐다. 물론 필자가 성서신학자였기에 타 학문 분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초기 한국교회사의 중심이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전개되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배위량은 부산-대구-서울에서 활동 후 평양으로 가서 선교의 꽃을 피우고 한국교회사에 중요하고 거대한 부분을 감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덜 평가되고 덜 알려진 인물이다. 우연한 길에서 필자의 전공 분야도 아닌 배위량에 대한 탐구와 연구에 매달린지 벌써 5년이 지났다. 2015년 8월 말 1년 동안의 연구년 활동을 마치고 독일에서 마치고 오자마자 배위량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했다. 그때까지는 배위량에 대한 탐구와 그가 걸었던 길을 찾고 순례 길로 개발한다는 목표만 있었다. 그런데 배위량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면서 그가 걸었던 길을 찾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탐구하는 일을 병행하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순례길을 걷는다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탐구하고 연구하게 된 동기는 경북 청도군 기독교 연합회 임원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청도 기독교연합회는 어느 지역보다도 열심이 있고 활성화된 곳이다. 필자가 배위량의 흔적을 찾는 것이 계기가 되어 청도 기독교연합회 임원회와 만남이 주선되고 청도읍의 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어 그곳으로 배위량에 관심이 있는 어떤 교수 동료와 함께 갔다. 대화가 잘되고 진지한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가 배위량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배위량이 1893년 4월 21일에 청도에 들어온 사실에 대하여 말하며 청도와 배위량이 관련된 것에 대하여 말하는 동안 청도 기독교연합회 어느 임원이 문제 제기를 했다. “틀린 사실을 말씀하셨다. 배위량은 1893년 4월 21일에 청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22일에 밀양에서 청도로 들어 왔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밀양 유천에서 청도로 4월 21일에 들어와서 안새부리(안새월)에서 하룻밤을 자고 4월 22일 아침 일찍 대구로 출발했다”고 하니 “그건 교수님이 잘못 아시는 것이다. 유명한 교회사 교수이신 박정규 박사가 그것에 대하여 연구했고 우리 집에 그의 연구 도서가 있다. 그것을 지금 가져 와서 보여 주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게 되자 그 회의장이 썰렁해지면서 당시 청도 기독교연합회 회장이셨던 분이 “4월 22일에 청도 들어오신 것을 21일이라고 하시니 저희가 혼란스럽습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제가 배위량에 대해 아는 것은 아직 별로 없지만, 배위량이 쓴 일기에 보면 4월 21에 청도에 들어온 일과 22일에 대구로 들어온 일이 기록되어 있어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배위량에 대한 연구가 아직 많이 없지만, 일기가 배위량에 대한 원자료이니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고 말하니 함께 대구에서 동행했던 모 대학교수 한 분이 “아니 이 어른들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그런 줄 알고 그러겠다고 해야지 고집만 부리면 됩니까!”라고 나를 탓하면서 청도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 알고 와서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사과하였다. 그 때 필자는 “청도에 배위량이 들어온 날은 4월 21일이 맞는데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대하여 사과합니까?”라고 물으니 그 교수는 “맞고 안 맞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분들이 그것을 맞다고 하니 그것에 대하여 나라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때 필자는 “아니 당신은 독일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학자이신데 어떻게 틀리는 것을 맞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그렇게 타협하십니까?”라고 말하니 그분은 “아니, 이 분들과 같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맞아요” “그러면 이분들 마음을 얻어야 되는데, 날짜 하루 가지고 그렇게 맞다 안 맞다 싸워서는 일이 않됩니다. 무조건 사과해야 합니다.” “아니 잘못 알고 계신 것을 잘못 알고 계시다고 말씀드리는 이것을 싸우는 것으로 보십니까?”라고 말했다.

이윽고 집으로 『청도기독교 100년사』를 가지러 간 분이 책을 가지고 돌아와서 같이 책을 같이 찾아보았다. 그 분은 배위량과 청도 관련 부분을 찾아서 필자에게 보여 주면서 배위량이 청도에 4월 22일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임원분이 보여 주신 부분에 배위량이 4월 22일에 청도에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은 없고 배위량이 대구에 4월 22일에 들어온 것에 대한 진술이었다. “1893년 4월 17일 부산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1개월이 넘는 장기 순회여행을 서경조 조사와 고용인 박재룡과 마부 두 사람을 대동하고 삼랑진 밀양 청도를 경유 대구에 도착한 날이 출발한 날로부터 엿새만인 4월 22일 토요일 오후 1시였다.” 필자가 위의 글귀를 보여 주면서 “여기에 보니 4월 22일에 대구에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20일 밀양 거쳐 유천서 잠을 자고 유천에서 청도로 4월 21일에 들어와서 안새월에서 잠을 잔 후 4월 22일에 대구로 들어간 것이 맞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우리는 유명한 교회사 학자이신 박정규 교수의 조언에 따라 청도와 대구의 경계선인 팔조령에 서 있는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에도 청도에 1893년 4월 22일에 배위량이 청도에 들어온 것을 기념한다는 것을 기록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배위량이 4월 22일에 청도에 들어온 것이 맞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논쟁이 계기가 되어 청도 기독교연합회에서 필자에게 과제를 주었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청도 기독교연합회에서 한번 발표회를 하시고 청도 기독교 역사에서 문제 되는 이 부분을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란 부탁을 받았다. 아울러 청도칠곡교회의 창립 100주년 역사책의 ‘대구경북지방 초기교회사’를 A4로 5쪽 정도 집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배위량의 흔적을 탐구하면서 가는 곳마다 “배위량이 누구이면 왜 이렇게 다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배위량을 공부하고 알아야지 대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청도에서 이 일을 겪으면서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성서학자인 필자가 주제넘게도 한국교회사에 손을 대게 되었다. 필자는 청도 분들이 왜 사실과 다른데도 왜 그렇게 주장을 굽히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사에서 틀리는 부분을 왜 이렇게 맞다고 주장하는가를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날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대구와 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팔조령에 서 있는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의 비문을 정독하게 되었고 그 비문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비문은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이 기념비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공식 선교사였던 배위량(裵偉良, Rev. William M. Baird,) 목사가 영남지역 선교지 책임자로 부임하여 사역하던 중, 주후 1893년 4월 17일(월) 부산을 출발 4월 22일(토) 오전 9시경 이곳 청도(淸道) 땅에 도착 복음을 전한 사실을 기념하여 청도군 지역 (67처) 전 교회가 뜻을 모아 그가 지나간 길목(八助嶺)에 이 비를 세우다.
청도 사람들은 어떤 지역 사람들보다도 종교성이 큰 것 같고 자존심이 강한 것 같다. 그 열심과 자존심이 다른 지역에서 못한 큰 일을 행했다. 그런데 그들의 열심을 바르게 안내하는데, 좀 더 정제되고 연구된 학문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면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와 같은 오류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 하루 차이인데도 청도 분들은 그 차이를 인정하기 힘들어 했고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필자는 성서학자로서 텍스트를 유심히 보고 그 텍스트에서 길을 찾고 답을 찾는다. 타 학문 분야의 학자들은, 필자가 잘은 모르지만, 전체적인 안목으로 보기 때문인지 텍스트를 유심히 보지 않고 앞의 어떤 학자들이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한 것에서 길을 찾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앞의 원조와 같은 학자가 실수하면 그 주장이 맞고 안 맞고를 따지지 않는지 아니면 너무 그 원조의 주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다른 분야는 필자가 경험하지 못하여 잘 모르지만, 배위량의 선교 일정에 대한 것에 국한하여 볼 때) 줄줄이 그 잘못된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이런 학문적인 경향성을 보면서 배위량을 직접 연구해야지 배위량의 흔적을 바르게 찾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배재욱 교수<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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