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이자익 목사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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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익 목사는 장로교단이 분열 이전에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한국교회의 큰 어른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수완이나 권모술수로 이룬 금자탑이 아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선거운동을 통해서나 조직을 동원한 결과도 아니다. 철저한 주님의 종으로 살았던 신앙의 결과이다.

이자익 목사는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남의 집 머슴으로 그 인생을 출발하였고, 농촌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받고 목사가 된 후 평생 그 교회를 지키며 목회하였다. 그는 부총회장을 거치지 않은 채 1924년 제 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고, 해방 후 제33대(1947년)와 제34대(1948년) 총회장에 연속하여 추대되었다. 왜 교회는 일제가 물러간 혼란기에 그를 두 번이나 연속하여 교계의 수장(首長)으로 모셨을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자익 목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사참배를 거절하였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으면서 신앙적 절개를 지켰다. 더 훌륭한 사실은 해방 후에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에 불참한 사실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이 때문에 교만해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가담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가슴 아파했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잘 지키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으로서 살았고 머슴된 자기 인생의 출발점을 항상 잊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을 판단하고 집행함에 있어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신앙적 양심에 따라 원칙을 고수하였고, 편 가르기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인간적인 약함에 관하여는 함께 눈물 흘릴 줄 알았지만, 사악한 교계 권력자들은 추상같은 단호함으로 책벌하였다. 그러므로 해방 후 교회는 그를 지도자로 모시는데 서슴지 않았고, 그는 혼란기에 교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오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자기의 자랑거리로 배를 불리는 사람들이요, 인간적 약함에 대하여는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자기 편은 봐주고 상대는 사정없이 모함하고 매장시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신앙의 철이 들어서 주님의 진짜 종이 되어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교계에 잘났다는 사람들은 많으나 정작 주님이 쓰실만한 인물은 없다. 이자익 목사가 그립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강남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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