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이야기] 믿음을 지킨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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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 장로교 소속인 배유진(유진벨) 선교사가 1895년에 목포에 선교본부를 두고 전주, 나주, 목포 등 호남지역에 선교활동을 하였다. 당시는 육로가 불편하여 주로 배로 목포에서 올라가는 길에 이곳 야월도에 잠시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당시 일본이 한국의 지식인을 친일파로 이용하였으나 뜻 있는 젊은이들이 상록 사상을 전개하면서 주민들에게 한글과 농촌계몽과 애국사상을 가르쳤다. 그때 국제기구인 YMCA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1908년 야월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남로당이 들어와 공산세력을 규합하여 주민들을 괴롭혔으며 특히 우익인 교인들을 납치, 살해하여 교회가 큰 피해를 입었다. 6.25가 발발하기 3일 전에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하여 공산군 1개 부대가 들어와 마을을 혼란시키면서 야월교회를 핍박하여 정일성 집사의 동생 정문성이 야산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9.28 서울 수복으로 공산군이 쫓기고 국군과 UN군이 들어와 주민들이 환영을 하였다. 이 환영식에 야월교회 조양현 영수의 아들 조영원이 주동하여 대부분 야월교회 교인들이 환영식에 참여하였다. 6.25때 이 지역이 늦게까지 수복되지 않아 빨치산과 공산군이 활동하여 1950년 9월 10일 야월교회 교인들을 교회에 모아 불을 지르고 김성종 영수, 조양현 영수, 최판원 집사 등을 잡아 바다에 빠트려 죽였으며 그 가족들을 모두 생매장하였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모두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였다.

이때 최판섭 집사는 무인도로 피신하였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교회로 돌아와 “내가 야월교회 집사니 나를 죽여주시오” 자진하여 순교하였는데 당시 야월교회 신도 65명이 순교를 하였다. 그리고 공산당들이 야월교회 건물과 교인들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사촌, 8촌까지 찾아다니며 사람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이 있었다. 이때 교인들은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는 중에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 순교와 믿음과 정신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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