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선교 초기의 한국교회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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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인들이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고 말한 이유

구한말을 전후하여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여럿 있다. 거기 교회 관계 인사도 있고 일반적 용무로 다녀간 일들도 있다. 여행가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말한 것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매우 비종교적이다라고 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라고 한 일도 있다. 있다고 해도 신령 숭배와 같은 저급한 샤머니즘적 형태 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들은 오래 머물러 있어서 말한 일이 아니다. 짧은 시간 머무르고, 지나가면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들 눈에 띄는 무엇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실상과 증거, 즉 외적 표식이 없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 서울 안에는 종교 건물이 없었다. 유교가 당시 조선의 국교요, 불교가 민간에 두루 퍼진 신앙이었다. 유교는 종교라고 보기 어려웠다. 불교는 서울 경내에 사찰을 가지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이곳저곳을 지나며 본 것은 마을 입구에 세워 놓은 장승과 같은 것이거나 무당 굿 등을 보았을 것이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이런 것이어서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고 말한 것이리라.

2. 기독교는 실상과 증거가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이 중 헐버트 선교사가 있다. 헐버트는 한국의 종교적 진공 상태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유교는 매우 현실적이요 불교는 매우 내세적이라는 것이다.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윤리에 지나지 않았고 불교는 현실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이면서 가장 신비적인 기독교야말로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에 꼭 맞는 종교라고 보고 기뻐했다.

1911년부터의 105인 사건을 겪으면서 후일 우리 자유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13년에『한국교회 핍박』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이 책을 펴낸 그의 관점은 크리스천의 그것이었다.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릇 이 글을 쓰는 뜻은 일본의 잘못함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한 바를 알리고자 함이다. 이 뜻을 알고 행하기를 힘쓰길 바라며, 이 글이 더 나아가 우리 민족 전체에게 유익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이 책에 이런 증언이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오히려 영국과 미국 교회에서도 부러워 할 일과 본받을 일을 실상과 증거로서 갖추고 있었다는 증언이다.

“선천 보다 더 큰 평양 같은 대도시는 더욱 그 규모가 굉장하니 이는 영국과 미국 교회에서도 부러워 할 일이요 본받을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국인들을 택하사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의 기초를 잡게 하신 것이리라.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벌써 제주도와 북간도,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와 북경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활발히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류금주 목사

<(총회인준)서울장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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