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은희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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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교원양성소는 후에 초급 사대로 되었다가 다시 사범대학으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입학하고 보니 이 양성소는 더는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용도 폐기(用道廢棄)로 없어질 그런 2년제 대학의 마지막 학생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몇 사람 안 되는 여학생을 희롱하기도 하고 방과 후에는 막걸리 통을 놓고 배구시합도 하고, 졸업 때는 교지를 만들어 졸업을 기념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 반에는 은희(가명)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머리를 한 줄로 묶어 뒤로 내리고 있어 ‘복조리’라고 별명을 붙여 놀리던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목사님이셨는데 인공 때 인민재판을 받고 돌아가시고 이 도시에서 저소득 모자 가족을 돕는 ‘모자원’이라는 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전혀 말이 없는 학생으로 제가 몇 번 편지해도 회답이 없어 돌을 던지면 ‘안압지’도 ‘둠벙’ 소리를 낸다는데 묵묵부답이라고 놀린 적이 있다. 혹 열렬히 구애하는 편지를 쓰면 가부간 답이 있지 않을까 하고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 회답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는 주일에 일부러 영화를 보자고 유혹하는 등 못된 짓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녀는 글로 답장은 안 썼지만 그런 무리한 부탁은 잘 들어준 편이었다. 우리는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공원에도 갔다. 그때 본 영화 중 ‘성처녀’라고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가 있었는데 오프닝 멘트는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라는 것이었다. 그 영화는 지금도 기억할 만치 인상적이어서 안 믿는 나도 이 가톨릭 영화에 매료되었었다. 은희와의 대화는 만날 때마다 나는 계속 지껄이고 그녀는 듣고만 있는 일방통행이었다. 그 당시는 젊은 대학생들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를 무척 따르던 때였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어서 만나면 마구 불을 뿜고 기독교를 비난했다.

신은 없다. 인간은 신과는 상관없이 그저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실존이 본질을 선행한다. 나는 던져진 자리에서 행동으로 나 자신을 찾아가야 하며 나는 행동의 주체며, 선택의 주체며, 책임의 주체다. 나는 모든 답이 없는 난제를 신에게 돌리는 안일한 기독교인을 싫어한다. 생기가 넘치는 인간을 죄인이라는 족쇄로 얽어매어 길들인 가금(家禽)의 무리로 만든 것이 기독교다. 

졸업 후 나는 결혼을 하고 우연히 길에서 남자 친구인 대학의 동창생을 만났다. 그는 제가 은희와 결혼하지 않은 것이 좀 놀라운 것 같았다. 자기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데 나 때문에 청혼도 못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소식을 물었다. 

“몰랐어? 걔는 모교인 미션학교에서 그렇게 와 달라고 사정하고 또 모친이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곳으로 가라고 했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일반 중학교로 가서 선생으로 있잖니?”

나는 그때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분명 느꼈고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결혼도 할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나는 너무 가난했고 그녀는 너무 적극성이 없었다. 내 가정 사정이 결혼할 수 없던 처지였더라도 그녀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께 화를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뒤늦게 참회했다. 나는 그때 마귀 노릇을 한 것이다. 사실 나는 그녀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녀는 나 때문에 믿지 않은 학교의 선생이 되었다니 나는 무슨 화를 받아야 하는지 망연자실하였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mail : seungjaeo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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