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67)이수정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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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을 길게 소개한 사람은 오윤태 목사였다. 그는 ‘한국기독교회사’ 4권 중 마지막 ‘선구자 이수정’을 썼다. 여기서 이수정은 개화파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기독교인이 되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 동경에 한국인 교회를 설립했으며 미국에 호소해서 선교사를 초청했다. 또한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신앙을 최초로 고백했으며 한국에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수정은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에서 1842년 이병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號)는 전제(齊)이다. 김요나는 ‘순교자 전기 1권’에서 이수정이 ‘학문을 숭상하는 아버지 이병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소질을 나타냈다. 서당에서 배우는 천자문을 줄줄 외웠고 다음에는 계몽편(啓蒙篇),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잘 익혀 나갔다’고 하였다.
1876년 2월 27일 즉 고종 13년 (음) 2월 3일에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통상조약이었다. 그 계기로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1876년 2월 22일 金綺秀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제2회는 1880년 金弘集 일행을 일본에 수신사로 보냈다. 1881년 국왕은 일본의 물정을 조사하려고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거기서 농학 부문 담당자였던 안종수는 츠다 센(律田 仙)을 방문하였는데 그 집 방안에 걸려 있는 한문 족자를 보고 관심이 갔다. 그 족자는 츠다 센이 고안하여 만든 것인데 내용은 한문으로 된 산상수훈이었다. 츠다 센은 이 족자를 그에게 선물하려고 했으나 기독교는 조선에서 금지된 종교이므로 만일 발각되면 처형당할 것이므로 안종수는 사양했다. 그러나 그 문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므로 돌아와서 친구인 이수정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수정은 임오군란이 일어난 때 명성황후를 모시고 충주까지 피신해 갔으므로 왕실의 총애가 깊었다. 이수정은 먼저 개화사상을 가진 佛僧 李東仁을 통하여 일본의 개화에 관심을 가졌다. 개화파들은 기독교 전파의 필요성을 교육과 의료라고 생각했다. 결국 기독교를 통하여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개화파의 의지는 정치, 경제, 외교적 차원으로 인식하고 기독교를 통하여 민부국강(民富國强)한 사회로 이룩하자는 목표를 갖게 되었고 기독교 측에서는 이 땅의 문화 전파자로 자리매김하며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배경이 정치적 동기에 의하여 지배층에게 유입되었다.
1882년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의 사절단 일행과 함께 이수정은 매이지 마루(明治丸)를 타고 9월 26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 후 동경에 도착한 이수정은 짐을 풀은 후 곧 츠다 센을 방문하였다. 츠다 센은 당시 일본의 개화주의의 대표자로서 1867년 후꾸자와(福譯諭吉) 등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농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농사 개량에 크게 힘써 공을 세운 인물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수정은 신사유람단원의 한 사람으로 일본의 농업, 법률, 우편, 수운 등을 연구할 목적이었다. 이수정은 국내에서 이미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일본으로 갈 때도 한문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구입해서 읽을 정도였다.

이수정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안종수가 말했던 츠다 센의 거실에 걸려 있는 한문 족자였다. 산상수훈의 구절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수정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동양의 고전 글귀와 다른 신선함을 느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츠다 센은 이 호기심 많은 조선인에게 족자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성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낯선 사람’들이 책을 한 보따리씩 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이요?’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이오?’ ‘성경이오.’ ‘조선에 가장 귀한 책’ 성경에 대한 외경스런 탐구가 계속되었다. 읽을수록 그 책에 빠져들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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