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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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3)

구미에서 상주까지 (1)
칠곡군, 김천시, 상주시, 군위군과 의성군을 접하고 있는 구미시는 경상북도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구미시 시의 중간을 흐르고 있어 용수 공급에 유리한 자연적인 입지여건을 갖추고 있어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꽃피었고 공업용수 공급에 유리하여 공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수려한 산세를 이루고 있는 구미 인근 서남쪽에는 해발 976m의 금오산, 동쪽으로 천생산, 동북쪽으로 청화산이 위치해 있다.
구미란 지명은 원래 선산군 구미면이었다. 선산군 구미면이 읍이되고 나중에 칠곡군 인동면과 통합하여 구미시가 되었다. 그 구미시가 1995년에는 선산군과 통합하여 새로운 도농 통합 형태의 도시가 되었다. 구미(龜尾)는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로 ‘거북 꼬리’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구미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69년 선산군 구미면이 공업개발지구로 지정되었고 읍으로 성격된 구미읍과 인근의 칠곡군 인동면을 1978년에 통합하여 구미시로 승격되었다.

구미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인 길재는 선산(善山 = 구미)에서 태어났고 그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길재는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나중에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 고려가 쇠약해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 질 때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했던 길재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사직한 후 고향 선산으로 내려왔다. 길재는 영천(永川) 사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고려말(高麗末) 사람으로 충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남의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길재는 성리학을 연구에 매진하여 그를 통하여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길재는 영남학파의 태두(泰斗)와 같은 인물이다. 그것은 길재가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여 살 때 많은 인재들이 선산으로 모여들어 그에게 학문을 배웠고 그들을 통해 학문의 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선산 사람 길재가 어떤 인물인지를 말한다.

길재가 낙향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12세 된 소년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길재는 애초에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며 홀로 학문에 정진하려 했으나 인근 고을에서 글을 배우려는 아이들과 성리학을 논하고자 하는 선비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던 터였고 그 소년도 그들 중 하나였다. 선산이 고향인 소년의 이름은 김숙자(金叔滋)였으며 길재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익혔다. 길재가 어릴 때처럼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강했던 강호(江湖) 김숙자(1389~1456)는 나중에 뛰어난 학자가 되면서 16세기 이후 정몽주와 길재로부터 비롯된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 김종직(金宗直)이 학문을 전수받으면서 영남 사림학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계보를 이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은 16세기 후반에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열되었다. 성리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면서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벌어지는 등 심오한 철학적 사상으로 크게 발전했다.” 길재의 학문과 사상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고 그들의 학문적인 영향 아래 놓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등에 의하여 형성된 영남학파로 이어졌기에 길재의 학통(學統)은 영남학파의 모체가 된다.

영남학파에 대한 글을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영남학파는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됐다. 이황과 조식은 을사사화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동서 분당 이전에 생을 마치면서 각기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선산(=구미)은 선산 사람인 길재 이후로 옛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지역이었다. 선산 출신의 많은 학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그들의 사상은 한국 철학의 중요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1995년에는 선산군과 통합하여 도농복합형의 시를 이루게 된 구미의 중심 산업은 섬유공업과 전기전자공업이다. 교통의 요충지인 구미 인근으로 경부선 철도,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지금은 구미시의 한 부분이 되었지만, 배위량 시대에 구미 인동이 칠곡군에 속한 한적인 농촌 지역이었던 것처럼 구미 해평도 배위량이 순회 전도 여행을 했던 1893년에는 선산군에 속한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다.
해평면은 해평현으로 개칭되었고 그 뒤 해평방으로 불리다가 1914년 산내방과 합하여 해평면으로 칭하여졌다. 구미시의 동쪽에 있는 해평면은 농촌지역이지만, 몇 가지 유의미한 점이 있는데, 낙산리에는 고분군이 존재하고 토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필자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순례를 하면서 고분군을 탐방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구미 인근 지역에 백자, 분청사기 등 옹기와 토기를 구워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해평면 낙산리 일대에는 백자의 파편이, 그 인근의 해평면 창림리에서는 상감된 자기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해평 낙산리 인근에는 통일 신라시대의 유물도 존재한다. 해평면 일선리 고택 문화재 마을은 안동댐을 만들 때 안동시 임하면 수몰지역에 살았던 전주 유씨를 중심한 수몰지역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만들어진 문화 마을이다.(일선리고택 문화재마을 주소: 경북 구미시 해평면 수류길 44-31.)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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