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73)이수정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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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이라는 인물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숨은 선교사였다. 외국에서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가 행한 일들은 타인이 추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이 외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함은 세계 선교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서 한국 개신교의 특징이며 자랑이다. 이미 한국 선교를 연구하던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이수정의 요청이 있자 즉각 호응했다. 1882년 5월 한미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고 전년 봄에는 푸우트(Lucius H. Foote)가 공사로 부임하였다. 이제는 신변의 위험이 없으므로 일본에 있는 선교사로 현지를 답사하게 하였다.
장로교는 낙스(George W. Knox)목사를, 감리교는 맥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를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 낙스 목사는 한국에 가지 못했으나 맥클레이 목사는 1884년 6월 서울에 와서 의료 사업과 육영 사업을 개설하는 선교 사업을 시작할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9월에는 장로교의 의사요 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을 서울의 공사관 의사로 보내고 사태를 관망케 하였다. 미국의 선교 본부에서는 이수정의 호소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한국 선교에 대한 긴박성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이수정의 글을 읽고서야 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한국 선교 사업을 위한 후원금도 들어오게 되었다.

1885년 4월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목사를 파송케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났으며 2개월 간 한국어를 배웠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 1894년 수정하여 서울에서 출판한 것이다. 이수정은 개인으로 세계에 한국 선교를 호소한 인물이 되었고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을 위한 적극 협력자였다. 그는 한국 선교를 호소할 때 선교사가 한국에 온다면 자신이 선교사를 동행하겠다는 말도 했었다.
이수정이 성경을 번역하던 1884년 12월 서울에서는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적 개화파가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그러나 삼일천하로 무너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당시 동경에는 유학생이 20여 명 있었다. 관비생만 아니라 사비생도 있었다. 유학생들은 개화운동에 앞장 선 김옥균의 알선이 있었다. 그들이 정변에 실패하여 망명한 김옥균과 접촉했다. 본국에서 이 유학생들을 소환하라고 명령했다. 3명만 소환에 응하고 17명은 거부하고 도피했다. 정부도 강경한 태도로만 임할 수 없어 학생들을 회유하여 귀국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안종수 등을 1885년 4월에 파견하여 학생들과 접촉케 했으나 실패하고 1886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인 박준우를 보냄으로 대부분의 유학생을 귀국시키게 되었다.

이수정은 유학생이 아니라 일본 문부성 초빙으로 동경 대학교의 교수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가 되어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던 실정을 알고 정부에서는 유학생과 함께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이 한국의 개화를 진정 원했지만 그의 주인 민영익이 김옥균 파에게 공격받았으므로 김옥균과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오윤태의 <선구자 이수정 편>에서 이수정은 두 차례나 자객에 의해 심한 부상을 당했다. 먼저는 김정식이 살해하려다 실패했고 김의순이 말다툼을 하다가 그의 복부를 차고 얼굴을 때려 큰 상처를 입혔다. 김의순은 일본 형법에 의해 유죄금고형을 받았다. 이수정은 1886년 5월 귀국해서 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므로 이수정의 행적은 1882년부터 1886년까지 4년도 못되는 기록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한국기독교 선교에 큰 역할을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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