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내가 살던 세계와 다른 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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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당시의 학기 초는 4월이었다. 나는 4월 1일(금) 조례 단에서 학생들에게 인사하고 전주의 기전여중·고 교무실에 앉았을 때 이것은 분명 꿈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너 딴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례증도 그렇거니와 이 학교에 취직이 되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것이 기적이었고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동화의 나라에서 신기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취직 시험을 볼 때부터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수학 교사 채용에 필기시험을 보아 공개 채용한다는 것이 다른 세계에 있는 일이었다. 다 인맥을 따라 취직하거나 ‘사바사바’(급행료나 뇌물)가 대세이던 때였다. 우리 교사 지망생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때 이 학교는 우리 모두에게 여비를 주고 점심으로 짜장면까지 사 주었다. 내가 아쉬워서 시험 보러 왔는데 이럴 수도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시험이 끝나자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을 상대로 10분씩 시범 수업을 하였다. 그리고는 교장 면접이었다. 나는 미국 교장이 먼저 내 학업 성적을 살펴보고 쉬운 영어로 경력 같은 것을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나는 군에 있을 때 최신 시설을 갖춘 대구의 부관 학교에서 3개월간의 군사영어 공부를 마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만했다. 그러나 금발 머리의 예쁘게 생긴 그 미국인 교장은 유창한 한국말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교회 나간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녀는 내가 얼마나 성실한 기독교인지 그것이 제일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그 뒤 신임 교사 환영회 때였다.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망설였다. 그런 자리에서는 유행가를 해야 하는가, 찬송가를 해야 하는가?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국인 교장을 의식하면서 대뜸 영어 노래를 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때 영화 주제가로 잘 불리고 있던 “케세라세라”라는 것을 불렀다. 선생들은 손뼉을 쳤다. 그러나 뒤에 나는 교장에게 불려가 한마디 들었다. 한미성(Miss. Melicent Huneycutt) 교장은 “기독교인은 ‘케세라세라’하고 살면 안 됩니다”하고 미소를 띠며 말했는데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평생 잊지 않고 살고 있다. 교회만 다닌다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기독교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학교는 또 나에게 셋방을 얻도록 무이자로 정착금을 대여해 주며 서무과장은 친절을 다해 나에게 좋은 셋집까지 미리 알선해 주었다. 이런 것들은 다 낯선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세상도 있었던가? 나는 내 과거의 삶을 숨겨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먼저 당혹스러웠던 것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정해 준 교회를 나가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교회도 잘 나가지 않았던 내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를 거절하면 가짜 교인의 본색이 드러날 것 같아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성경의 진리보다 이야기를 좋아했다. 나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중학생들에게 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성경을 강제로 읽어냈다. 다음은 성가대였다. 성가대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진땀을 빼며 성가대원 노릇을 하였다. 성가대에는 베이스로 굵은 목소리를 가진 이웃 남자 중학교의 교감 선생이 계셨다.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다른 파트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집에 가면 시창 연습을 열심히 하였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교인이 되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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