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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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첫딸을 얻은 그해에 우리는 김 장로님 댁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거기서 기독교 학교의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첫딸을 얻었으며 신앙생활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그분들은 새벽기도를 다니는 분이었다. 그들이 새벽기도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초 신자로서 충격을 받았다. 우리도 그렇게 새벽기도를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나가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너무 잠이 부족했고 신혼 생활에 그런 결심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한 학기쯤 지나자 김 장로 별채에 기전 학교의 교목이 세 들었다. 두 내외분만 사셨는데 이분들은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분들이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아직 잠이 덜 깼을 때 두 분의 찬송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이 또 초 신자인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도 새벽기도는 나가지 않아도 가정예배는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얼마쯤 지나자 아내가 우리도 가정예배를 드리면 어떻냐고 말했다. 나는 거절했다. ‘다락방’으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학교에서 익숙해졌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꾸준히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나는 너무 잠이 많아서 학생 시절에도 밤새워 공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시험 때는 일찍 잘 테니 깨우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부탁하고 다른 날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잘 자고 나야 정신이 맑아져서 시험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랫마을에 표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분들은 새벽기도도 다니고 가정예배도 드리는 분이었다. 그들은 가정예배를 드리면 하루를 하나님과의 대화로 시작할 뿐 아니라 부부간에 서로 어떤 문제로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는지 알게 되어서 좀 더 부부 사이에 벽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아내는 우리도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다시 졸랐다. 그때는 우리는 서원 넘어 마을의 언덕 위, 김 장로 댁에 살다 방도 좁고 해서 아래 미나리꽝이 있는 낮은 지대로 옮겨 살 때였다. 온통 미나리를 심은 논들이었다. 우리가 옮긴 것은 그 집 김 장로가 좀 부담스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은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파와 통합파로 갈라져 교회 분열이 심할 때였다. 그런데 김 장로는 합동파였는데 나를 만날 때마다 선교사들과 선교 기관에 남아 일하는 사람들은 주체성 없는 아부쟁이라고 통합파 사람들을 마구 비난했었다. 용공 주의자이며, 선교사들에게 손 내밀고 보조를 사적으로 얻어 교회를 세우려 하는 거지라는 것이었다. 한때 합동파 사람들은 미 선교부 울타리에 분뇨를 쏟아붓기도 했다. 나는 교회의 교파 싸움에 별 관심이 없어 김 장로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한여름이었다. 그곳은 미나리 논 때문인지 모기가 많았다. 우리는 밤에는 모기장을 치고 자야 했다. 하룻밤은 아내가 11시에 정전이(당시는 이 시간에 전기가 나갔음) 되자 촛불을 켜 놓고 갓난애의 빨간 모자를 뜨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주전자에서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이내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피곤했다. 잠들면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다가도 어린애가 칭얼대면 달래고 젖을 빨리고 또 자주 기저귀를 갈아주곤 했는데 그런 일은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잠결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내가 놀란 소리와 함께 마구 흔들어 깨웠기 때문이다. 일어나 보니 모기장에 불이 옮겨 한쪽이 빨갛게 불길로 타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손으로 누운 어린애 반대편으로 모기장을 낚아챘다. 아내는 주전자에 들어 있던 물을 끼얹었다. 겨우 불길을 잡자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주인집 목조건물이 홀랑 불에 타 없어져 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생활에 게으른 우리를 이런 방법으로 훈계하셨다.

우리는 불을 끄고 난 다음부터 <다락방>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다닐 때 우리를 인도하소서. 우리가 잘 때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는 신앙에 나태한 우리 삶을 깊이 회개하였다. 우리는 지금 나이 90이 다 되어 가는데도 다락방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도 집을 찾아오면 으레 <다락방>으로 함께 예배드릴 것으로 알고 있다. 오랜 습관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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