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포로가 된 사단장

Google+ LinkedIn Katalk +

6·25전쟁에 최초로 참여한 미 제24사단 스미스대대는 초전에 실패했지만, 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이끄는 본대(34연대, 19연대, 21연대)가 7월 5일까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7월 8일 천안이 무너지고, 12일에는 조치원이 무너졌다.
딘 소장은 대전(大田) 방어를 결심하고 7월 12일에는 금강방어선, 14일에는 공주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하고 사기충천한 적의 북한군 4개 사단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적 제3사단과 제4사단이 7월 17∼18일 이틀간 맹공을 퍼부어 금강방어선이 무너지고 20일 새벽 대전을 점령했다. 사단장은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시가전을 폈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병력의 40%가 희생됐으며 장비도 거의 손실됐다. 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함에도 적을 가볍게 여기고 ‘준비 없이 참전한 전투’의 결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년 동안 전쟁 없이 일본 점령군으로서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갑자기 한국전선에 투입된 대가는 이처럼 참혹했다.
대전 방어에 실패한 미 제24사단은 워커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영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대는 이미 전투력이 상실되고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사단장은 7월 20일 오후 3시에 철수명령을 내리고, 마지막 소대가 철수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부관 클라크 중위와 함께 지프를 타고 불타는 대전을 빠져나가기 위해 과속으로 달리다가 그만 옥천-영동 갈림길에서 옥천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어갔다. 부관이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을 알고 산내면 부근에서 차를 돌리려고 할 때, 적의 공격을 받았다. 급하게 산으로 피신했지만 야간에 길을 잃고 말았다. 운전병과 둘이 산속을 헤매며 은신하고 있었는데 운전병이 애타게 목말라하는 모습을 보고 물을 구하러 계곡을 내려가다가 어둠속에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홀로 고립됐다. 그때부터 36일 동안 낮에는 숨고 밤에는 별을 보며 남쪽을 향해 걸었다. 나무 열매와 풀뿌리 등으로 생존하는 초인적인 삶을 살면서 대구로 간다는 것이 전북 ‘진안’으로 가게 됐다.

진안 산속에서 어느 날 선량한 양민 박종구(朴鍾九·당시 38세)를 만나 잠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대구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는 말을 믿고 민가에 숨어 있다가 8월 25일 한두규(당시 40세)의 밀고로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 딘 소장은 그로부터 3년1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생지옥을 경험했고 1953년 9월 4일 포로교환 때에 판문점을 통해 석방됐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매우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석방 후 미국 국민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온갖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이면서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고 군인의 명예와 본분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 딘 장군은 적군의 모진 고문과 박해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장군으로서 체통을 지키며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군사기밀을 발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의 몸은 뼈만 남아 해골과도 같았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조국을 생각했고 장군의 자존심을 지키며 힘든 과정을 잘 견뎠다. 만약 딘 장군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각종 군사기밀을 실토했다면 유엔군의 작전은 상당히 차질을 가져왔을 것이다. 미국 국민들은 비록 포로가 됐지만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군사기밀을 끝까지 지킨 딘 장군을 존경하며 모든 ‘군인의 표상’으로 삼기를 원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높이 평가해 훈장을 수여하고 군 생활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미 24사단은 비록 대전방어전투에서 사단장을 잃었지만, 그들의 지연전 덕분에 7월 15일 미 증원군 25사단이 부산에 상륙하고,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점에서 그들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