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왜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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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출중한 무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감각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왕이 되었는 지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지지하지 않고, 유다 지파 단독으로 나라를 세우고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 10지파가 보았을 때 다윗의 행위는 사울 왕가에 대한 ‘반역’이었다. 다윗에 대한 북10지파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으나 ‘유다 지파’ 안에는 시므온 지파가 독자성을 잃고 동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머지 지파는 10지파가 된다. 지리적으로 유다 지파 북쪽에 위치해 있어 ‘북10지파’라고 호칭한다.)
이런 상황에서 블레셋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은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인물은 다윗밖에 없다고 생각한 북10지파 지도자들은 자존심과 불편한 감정을 누르고 다윗을 찾아가 왕이 되어 달라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왕이 된 다윗은, 북10지파를 배려하며 유다 지파와 북10지파 통합 정책을 펴나갔다.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었을 때 수도는 유다 지파 남부에 위치한 헤브론이었다. 그러나 북10지파를 고려할 때,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다. 어느 지파에 속한 곳에 수도를 정하느냐는 문제는 당시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다. 다윗이 심사숙고 끝에 택한 곳이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는 유다 지파 안에 있었으나, 그때까지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하고 원주민 여부스 족이 그대로 살고 있던 특이한 곳이었다. 따라서 유다 지파에는 속했으나, 유다 지파의 색채가 거의 없는 ‘중립적’인 곳이었다. 그곳을 수도로 정했을 때 북10지파도 다윗이 유다 지파에 편파적이라고 불평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유다 지파도 새 수도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유다 지파 안에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다윗이 12지파 전체의 왕이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유다 지파였다. 만일 다윗이 유다 지파를 떠나 다른 지파에 수도를 정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 못됐을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유다 지파 안에 있었지만, 유다 지파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 벤야민 지파와는 지척의 거리라는 것이다. 벤야민 지파는 어떤 지파인가? 사울 왕을 배출한 지파였고, 사울 왕은 벤야민 지파의 영웅이었다. 벤야민 지파 사람들은 사울 왕가에 충성했고, 비록 몰락했으나 여전히 사울 왕가에 대해 충성심과 미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벤야민 지파는 반(反)다윗 왕 정서가 가장 강한 지파였다. 벤야민 지파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한 것은 벤야민 지파의 반다윗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은 다윗에게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좋은 안성맞춤의 도성이었고, 그곳을 생각해 낸 것은 다윗의 뛰어난 정치적 지혜였다. 남은 문제는 지난 2백 년 동안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도성 예루살렘을 어떻게 정복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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