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내 길의 한 줄기 빛 이만영 장로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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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광일의 전성기(9)

회사 설립 승인과 유화제의 개발

조용희 명예회장과 이만영 회장은 영등포 문래동에 공장을 차리고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사글세로 사는 작은 집 마루까지 재료와 제품의 포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렇게 개발한 제품을 직접 지고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걸어서 거래처에 배달하곤 했다.
비 오고 눈 내리던 얄궂은 날이면, 20kg 무게의 무거운 포대를 들고 갔다가 반품을 당하거나 거절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왜 그렇게 힘이 쭉 빠지던지 계속 흘러내리는 포대를 다시 고쳐 들며 ‘내가 왜 일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비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약해져 가는 마음을 고쳐먹곤 하였다.
자본 없이 신제품 개발에만 매달리다 보니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셋집에서 쫓겨 나기 일쑤였다. 이사를 열세 번은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은 여동생이 고등학교에 가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어렵게 빚을 내어 돈을 구해 보내주었다. 학업을 중단한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동생을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사정이 어려워 그 빚을 갚지 못해 독촉을 받다가 결국 아내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뽑아 주었다. 유일하게 준 결혼예물 금반지였다. 빈 손가락을 만지며 고개를 떨어뜨리던 아내 곁에서 그는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고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한 채 사업에만 매달리던 이만영 회장은 드디어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품질의 유화제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기름과 물이 섞여 하나로 조화되어 새로운 맛과 기능을 하게 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차게 뛰었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지난 시절의 어려움은 간데 없고 뿌듯한 마음으로 가득 찼던 기억이었다. 그 유화제는 지금도 주식회사 광일의 선두제품으로 든든한 기반이 되고 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고비도 많았다. 대부분의 회사는 자본과 기술, 조직이 취약한 창업 초기에 고비를 맞는다. 그때 고비를 맞고도 살아남으면 기업이 되는 것이고,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광일 역시 창업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1970년 1월 1일 광일은 공장을 확장하여 이전할 수 있었고, 1972년에는 상표도 등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체 기술개발에도 성공했다. 처음엔 기술개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입품보다 월등한 품질의 유화제를 개발했음에도 여전히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시장에서 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가 극히 낮았다. 식품회사들은 국산 유화제보다는 오랫동안 거래해 온 수입품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름없는 신생업체인 광일의 제품을 쓰려 하지 않았다.

어렵게 개발한 자식 같은 유화제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만영 회장은 억울해서 잠도 자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수없이 고민을 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좋다. 못 믿겠다면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이만영은 그날부터 비커에 수입 유화제와 광일의 유화제를 따로 담아서 각 식품회사마다 다니며 담당자들 앞에서 시연을 했다.
기름과 물이 섞이는 정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준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개발한 유화제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발로 뛰고 직접 눈으로 보여주면서 진심을 다해 노력하니 조금씩 광일의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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