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위험한 부르심 <창세기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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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은 “예”, “아니오”, “기다려 주십시오” 이 세 가지입니다. “아니오”라고 하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떠날 수 있는 이유보다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더 크고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 중에서도 그의 발목을 가장 세게 붙잡는 것은 나이 많은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인만큼 그래도 좀 심사숙고 하고 대답한다면, 또 하나의 응답은 “기다려 주십시오” 입니다. 왜 기다려 달라고 하는 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를 기다려 달라는 것이겠지요. 돌아가시면 장례하고 떠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오”에 비하면 상당히 고민한 응답입니다. 어쩌면 예와 아니오 사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응답입니다. 마지막 응답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지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면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야 합니다.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대단한 결정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위험합니다. 얼마나 위험한 지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지는 이런 질문을 해 보면 가늠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하는 이런 제안을 과연 몇 사람에게 하셨으며, 몇 사람에게 퇴짜 맞으시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하는 걸까요? 쉬운 부르심이라면 누구라도 응답했을 것이고, 위험한 부르심이면 아무나 응답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이런 제안을 받은 사람이 그 당시에 없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유일했을까요? 

당시 아브라함이 실제 거주하던 곳은 하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까지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아들(하란)이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죽었습니다.(창 11:28)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자식의 죽음을 보는 부모의 아픈 심정을 묘사하는 말일텐데 데라 역시 보통의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다면,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도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옵니다. 성경은 데라의 이민 이유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지만, 아무튼 데라는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함께 데리고 나온 식구는 달랑 아들 아브라함 내외와 하란의 아들 롯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본토를 떠나 아무도 아는 곳 낯설고 물선 땅에 온 데라에게 아브라함은 그렇게 의지가 되는 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 아들의 죽음이 주는  비애를 경험한 아버지에게 이제 남은 아들 아브라함은 특별한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한 아들(나홀)이 고향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니오”라고 해도 누구도 아브라함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데라가 가고자 했던 곳과 아브라함이 가고자 한 곳이 같았던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데라를 먼저 불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하란으로 들어간 데라는 그곳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보더라도 아브라함 말고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르심과 응답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이 출발해 온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 지금 아브라함에게 하듯 이런 제안을 한 사람들이 갈대아 우르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하나님은 많은 사람에게 1-3절의 놀라운 제안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후 3천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가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브라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왜요? 다른 사람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요. 아브라함 이전에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면 그의 이름이 여기 있을 것이고, 아브라함도 거절하고 넘어갔다면 그 이후 다른 사람의 이름이 여기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약속과 계획을 제안하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찾고 또 찾을 때, 마침내 응답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을 찾고 있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놀라운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짜로 불러 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 주시겠다, 복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매주일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문제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부르심이 없는 게 아니라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같은 위인은 되고 싶어 하면서 아브라함 같은 부르심에 아브라함처럼 응답하지 않습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고, 응답하지 않으면 그저 별 볼 일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인물로 역사를 살다 가는 것으로 인생 끝입니다. 시대와 무대가 아브라함 때에서 지금 여기로 옮겨지는 게 다를 뿐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장대영 목사

<안강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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