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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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70)

구미에서 상주까지 (18)

이상규가 옮긴 배위량의 일기 중에서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밤, 낙동에서 쓴 일기에 아래와 같이 배위량이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저녁, 낙동에서 일기를 쓰면서 선산 읍내를 다녀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4월 26일, 수요일 저녁, 낙동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했다. […]
우리는 선산 읍내를 지나 왼쪽 방향으로 갔고, 강을 건넜다.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김천(Kim San)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의 서쪽지역에 속한 곳이다.

“우리는 선산 읍내를 지나 왼쪽 방향으로 갔고, 강을 건넜다.”는 일기를 쓴 것이 4월 26일 일기이니, 만약 배위량 일행이 선산을 방문했다면 4월 26일에 방문했을 것이다. 그런데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작성한 지도에 낙동에서 선산으로 갔다가 선산에서 상주로 간 것으로 묘사한 ‘제 2차 순회전도 여행’지도는 4월 27일에 방문한 것으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표기의 오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밤, 낙동에서 쓴 일기에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했다.”(“Arrived early. Made only fifty li today owing to the sickness of one of the Mapoos”)고 말한다.
이 시점에 배위량은 “오늘은 겨우 50리밖에”(“only fifty li today”)란 말로 자신이 여행한 길이 자신의 계획보다 짧은 거리였음을 적시한다. 이런 말을 사용한 것은 자신은 그날 ‘낙동’을 거쳐 ‘상주’까지 여행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하지만, 배위량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그날 상주까지는 들어가기 어려운 노정이었을 것이다.
그날 여행의 정황으로 볼 때 1893년 4월 26일에 배위량과 그의 제2회 순회전도여행단은 마부 중의 한 명이 병들어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한 것이다. 배위량 순회전도단은 평소 순회전도여행에서 60리 정도를 여행했다. 그런데 이 날은 50리 정도 여행하였기에 그는 일기에 그 사실을 적시하면서 “오늘은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했다.”라고 한 것 같다.
요즈음 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도 아닌, 옛날의 나그네들이 말하는 통상의 거리 치수였지만, ‘50리’라는 언급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해평행정복지센터에서 상주낙동우체국까지 거리가 대략 22km이니 쉬지 않고 걸으면 5시간 30분 걸리는 거리이다. 1893년 당시로 돌아가서 해평에서 낙동을 거쳐 상주까지 하루에 갈 예정으로 배위량이 길을 떠났다면 40km정도 되니 안 쉬고 걷는다면 10시간 정도 걷는 거리이다.
필자는 배위량 순회전도여행길을 도보순례로 걸을 때 50km 이상을 걸은 적도 있다. 그렇게 걸을 생각으로 여행을 출발한다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걸어야 가능한 거리이다. 그런데 당시 마부들은 여행자들의 짐을 말에 싣고 짐을 날라다 주는 것이 자신의 생업이다. 하루에 100리 이상을 걷는다면 말도 사람도 탈이 날 확률이 높다. 100리를 걷는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할 때 인내를 가져야만 감행할 수 있는 먼 길이다. 배위량이 통상 하루 60리 길을 걸으며 전도여행을 다녔지만, 4월 26일은 50여리를 여행했다.
그렇지만, 낙동은 해평에서 상주로 가는 길목에 반드시 들러서 가야 하는 낙정나루터 건너편에 형성된 나루터 마을이었다. 전도여행을 나온 배위량 일행이 무슨 목적을 가졌다면 100리가 넘는 길을 하루에 걸어 상주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의 무리를 하면서까지 하루에 100리 길을 걷는 일이 전도여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먼 길을 걷는다면 짐 날라 주는 것을 생업으로 영위하는 마부들이 흔쾌히 따라주기가 어려울 정도의 먼 길이다.
그런데 왜 배위량은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했다.”라고 일기를 기록했을까? 낙동에 도착한 후 그는 자신의 일기에 적시한 것처럼 선산을 그날 방문했을까? 만약 그가 선산을 방문했다면 자신이 동래를 출발하면서 가져온 여러 가지 여행 물품을 주막에 남겨두고 선산으로 가서 그곳을 둘러보고 왔을까?
만약 배위량이 정말 선산을 방문했다면 4월 26일에 방문했을 것이다. 낙정 나루터 건너편에 위치한 낙동은 1893년 당시에 나루터 마을이었고 주위의 다른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이었기에 그곳에 주막집이 있었을 것이고 그 주막에 짐을 두고 선산을 방문하고 돌아 와 선산을 방문한 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낙동에서 출발하여 선산을 방문하고 다시 낙동으로 돌아오는 길은 쉬지 않고 가서 선산에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바로 낙동으로 다시 돌아온다 해도 최단거리 길을 걸을 경우 왕복 8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길이다. 통상 편안한 길로 걷고 쉬기도 하고 물도 한잔 마시고 선산에서 사람을 만나 전도 활동이라도 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12시간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그런데 배위량 전도단은 4월 26일에 이미 해평에서 낙동까지 50리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배위량이나 서경조는 낙동에서 선산을 거쳐 다시 낙동으로 돌아오는 길을 알지 못한다. 마부들이나 그 길을 알텐데, 마부들이 자신의 일정 이외의 일정을 위하여 하룻길이나 되는 일정을 예외적으로 배위량에게 호의를 베풀어 시간을 할애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마부 두 명 중에 한 명은 병이 들었다.
더욱이 배위량이 4월 26일 일기를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밖에 여행하지 못했다.”는 말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배위량은 해평에서 출발하여 낙동에 일찍 도착하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여행을 돌아보면서 일기를 기록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날 해평에서 출발하여 선산을 방문하고 다시 낙동으로 돌아오는 고된 일정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해평에서 출발하여 낙동까지 50리 길을 여행한 후 낙동에 일찍 도착하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쉬면서 그날 일기를 기록한 것이 맞다고 본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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