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미국선교사, 미국정부와 태도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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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경배 교수가 정리한 ‘미국선교사의 대한, 대일 자세 변천사’

한국교회사 연구의 대석학이자 필자의 스승인 민경배 교수는 1991년 발행된 그의 저서 「일제하의 한국기독교 민족․신앙운동사」에서 ‘미국 선교사의 대한 대일 자세 변천사’를 도표로 정리한 일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첫째, ‘일본, 미국 그리고 한국’이 미국 선교사의 대한 대일 자세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역사적 요인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제질서에서 한미일이 갖는 지정학적 요소가 중요했다는 말이다. 둘째, 미국 선교사를 단일한 집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미국 내의 선교본부, 한국 내의 현지 선교부, 그리고 각 도나 군 같은 곳에 필요에 따라 세웠던 주재소 격인 ‘스테이션(station)’ 그리고 선교사 개인” 이렇게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 단위별 한미일 관계의 역사적 변천에 따라 대한 대일 자세가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경배 교수는 미국 선교사의 대한 대일 자세의 변화를 가져오는 역사적 획기들은 바로 1894년 청일전쟁, 1910년 한일합병,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이라고 보았다. 선교 초기부터 청일전쟁 전까지는 <일본정부>가 따로 서고, <미국정부-미선교본부-현지선교부-선교스테이션-개인선교사-한국교회>가 한편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부터 획기가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한 단위씩 순서대로 일본정부 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래서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한국교회 편에 섰던 개인 선교사까지 일본에 의해 쫓겨 가고 해방 전까지 삼 년 동안 한국교회가 홀로 일제 말 칠흑의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2. 1905년 을사늑약 당시 미국정부에 대한 내한선교사 헐버트의 분노

1910년을 획기로 하여 일본 정부가 미국 정부와 나란히 손잡게 되었다. 이때 미국 선교사는 미국 정부와는 다르게 한국교회 편에 선다. 한국이 아닌 한국교회라 함은 이때는 나라가 없어지고 난 뒤이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헐버트 선교사이다. 그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상기시키는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 워싱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고자 했으나 면담은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미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헐버트 선교사는 탄식한다. “한미 간의 오랜 우정에 해당하는 행위가 결국 이런 것이었나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이것을 배신과 변절의 명백한 행위로 볼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 미국인은 과거 30년간 미국의 성조기는 공의와 진실 때문에 서 있으며, 아무 이기적 이해 관계없이 다만 정의 편에 서서 힘껏 뒤 밀어주겠노라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오니 우리가 먼저 저들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너무 한국의 이해관계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예전 내한선교사로 활동했던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모욕적인 방법으로 해임당했다.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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