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38선의 지정학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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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8선이 처음 그어진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어느 나라 사이에 그어졌는가?

흔히 38선이라고 하면,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과 미국이 각각 북한과 남한에 진주하면서 그 진주 경계선으로 그은 것이 처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필자는 한국교회사 연구의 대석학인 필자의 스승 민경배 박사로부터 38선은 한국에서 기구하고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민 박사의 정리에 의하면, 

가장 처음 38선이 구획된 때는 1896년 6월 9일이었다. 러시아 외상 라바노프와 일본 군벌 수장 야마가따 아리도모(山縣有朋)가 노일협약으로 38선을 구획했다. 

두 번째로 38선이 고려된 때는 1903년 10월 3일이었다. 이때 역시 러시아와 일본 간 나눈 한국-만주 교환문서에 평양-원산을 잇는 39도선을 약정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1924년의 일이다. 일본 중의원 마쯔야마 쯔내지로(松山常次郞)가 <조선참정권 문제>에서 대륙에서의 한반도 문제를 다루며 38선을 고려하고 있었다.

네 번째는 1945년 8월 2일 포츠담회담 때의 일이다. 미군과 소련군의 한국 진주 분계선으로 38선을 확정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의 일로 38선은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 경계선이 되었다.

여섯 번째는 1953년 7월 27일의 일로 휴전선이 38선에 연하여 구획된 것이다.

2. 38선은 미국-소련 사이가 아니라 일본-소련 사이의 문제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38선은 줄곧 러시와(소련)와 일본의 대결 구도에서 논의된 것을 당장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38선이 처음 논의된 때인 1896년 당시 세계는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북진정책이 충돌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은 유럽의 국가들이 다 거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중국의 황준헌 역시 「조선책략」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길은 한국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연결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던 형편이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상주 선교사 언더우드 1세는 한국 이 은거의 나라가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된 때는 바로 청일전쟁 이후였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런데 청일전쟁은 일본의 대륙진출의 꿈이 처음 성공하게 된 것이라고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300년 전인 임진왜란 때 실패한 대륙진출의 꿈이 비로소 청일전쟁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본이 청일전쟁 후 10년 뒤에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들의 대륙진출은 태평양까지 제패하려고 하면서 미일전쟁까지 불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국 미국에 의해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한국에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38선의 문제는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문제가 아니요, 일본과 소련 사이의 문제였음이 38선의 기구한 운명과 역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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