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학도병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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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말, 북한 공산군의 계속되는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고 낙동강까지 밀리자 조국의 운명을 감지한 학도병들이 전국에서 낙동강 전선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펜 대신 총을 들고 자원하여 전선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들은 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다. 오직 애국심 하나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뛰어든 것이다. 학도병의 시초는 6월 29일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를 조직하고 각 학교별로 학도의용군을 모집하도록 권고한 이후 곧바로 27,000여 명이 지원한 것이 시초였다. 당시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피난민 구호, 가두선전, 부상병 돕기 등 후방지역 선무활동과 구호를 하도록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를 원했고 군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대전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조직해서 참전하게 됐다. 또 개별적으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현지 부대에 자원입대하는 학생이 줄을 이었다. 낙동강 전선이 형성됐을 때는 학도병의 지원이 절정에 이르렀다. 5만여 명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국적으로는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도병들은 다부동전투, 안강전투, 포항전투, 영덕전투, 영천전투, 영월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국군의 희생이 많아지면서 보충병 충원이 어려웠는데 학도병들이 자원입대하는 바람에 큰 공백을 채워 주었다. 학도병들은 특히 수염을 기른 김석원 장군을 좋아해서 3사단 지원이 많았다. 3사단 22연대, 25연대, 26연대는 거의 학도병들로 채워졌다. 일본에서도 교포 청년들이 조국을 돕기 위해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2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1950년 9월 유엔군에 편입되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재일동포 학생은 모두 642명이 참전하여 135명이 전사했다. 경상도 학도병들 중에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1950년 9월 14일 양동작전으로 실시된 영덕의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했다. 해군의 지도 아래 현역군인 없이 학도병만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는데 772명이 참전하여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당했다.
전황이 안정되면서 1951년 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학교로 복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학생들 중에는 현역으로 입대하여 정식으로 계급, 군번을 부여받고 조국을 지킨 영웅들이 많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영웅적 존재인 학도병들이 총 몇 명이나 참전했었는지 우리정부에서 그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현충원에도 학도병의 위패는 보이지 않고 무명용사들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안타깝다. 한편, 포항전투에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학도병의 편지 1통이 발견되었다.

『어머니/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귀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지금 내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기를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우리는 겨우 72명인데 적들은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내가 오늘 죽을지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두려운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집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 군요/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또 쓸 테니까요. 그럼…. /학도병 이우근 올림(동성중학교 3학년)』그는 이 전투에서 47명과 함께 산화됐다.
필자는 이 편지를 읽고 쓰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아내에게 읽어주었다. 한두 줄 읽어 내려가다 내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꼭 내가 71년 전 학도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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