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98)소다 가이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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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일본인이라면 적대시하던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존경받은 ‘일본인’ 41년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며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의 묘비 옆에는 시인 주요한의 헌시가 있다.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소다 가이치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남서부 야마구치 현(山口縣) 소네무라미다(曾根村隅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오카야마(岡山) 시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훗날 한시를 지은 것을 보면 한학을 잘 공부했다. 21세 때 고향을 떠나 당시 서양 문물의 창구이며 일찍 개항한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고학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25세에 노르웨이 화물선의 선원이 되어 홍콩으로 가서 영어를 배웠다. 다시 28세 때 청일 전쟁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서 독일인의 공장에서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그때 독일어를 배워 훗날 독일어 서적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중국 본토에 가서는 해군으로 복무했고, 중국 혁명가 쑨원(孫文)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다시 대만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대만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는 30대 초까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었고, 방랑하며, 쾌락의 삶을 살았다.
소다는 1899년 31세 때 방황이 끝났다. 미혼의 청년이 외국에서 직업을 갖고 산다는 것은 매우 고독하고 허무한 날이 많다. 친구도 없다. 저녁에 방에 들어오면 피곤하고 찌든 몸으로 쓰러져 잔다. 술집에 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방랑생활은 쉽지 않다. 이 ‘방랑자’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날도 소다는 혼자 술을 마시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술은 머리까지 올라 정신없이 거리로 나섰다. 한참을 걸었으나 어딘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었다. 밤은 깊었고 길은 한적했다. 이날따라 술이 많이 취했다. 어느 공원을 지나다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없다.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만취한 상태로 쓸어졌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데 길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그를 흔들었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를 들쳐 업고 뛰었다. 한 여관에 들어갔다. 침대에 뉘었다. 물수건을 가져다가 머리에 얹었다. 물을 입에 흘려 넣었다. 얼마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나 앉았다. 소다가 모르는 사람이 앞에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지냈다. 그 사람은 아침에 식사비와 여관비를 내주고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 소다가 정신이 없어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인이 아니요 일본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고국을 떠난 사람이라면서 조선에서 왔다고 했다. 소다는 조선인이라는 말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살려준 사람을 조선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삶의 변화를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소다라는 사람은 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방랑의 길에서 자신을 찾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자세를 바르게 정하게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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