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국교 수립과 기독교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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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를 통한 하나님나라 확장과 기독교문명의 전개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확장이다. 선교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지평이 넓어진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선교의 불꽃은 안디옥과 소아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그리고 마침내 로마까지 번져갔다. 안디옥, 로마,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는 초대교회 500년 동안 교회의 4대 중심지였다. 그리고 초대를 거쳐 중세에 이르면서 교회는 잠자는 유럽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유럽을 문명화했다. “유럽의 자연스러운 발전 속도에 선교를 내맡겼더라면 유럽의 기독교화는 요원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16-17세기 선교의 주역은 로마가톨릭 국가들이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표적인 나라들이었다. 대서양 서쪽은 스페인, 대서양 동쪽은 포르투갈이 맡아 선교하였다. 그러다가 1805년 영국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프랑스의 가톨릭국가 연합군을 대파한 사건을 경계로 하여 선교 주도권은 개신교 국가들로 넘어갔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 대표적인 나라들이었다. 이 무렵 런던선교회가 중국 상해로 파송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순교의 피를 흘렸다.

한편 1840년~1890년에 일어난 미국 경제의 폭발적 성장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풍요와 부를 주신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공업 생산량이 그 이전의 7배에 달하면서 미국은 ‘세계적인 강력한 부국’으로 떠올랐다. 이때 이들은 세 가지 일을 했다. 우선 부흥회로 모였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 무디, 생키, 스펄전이 그 주역이었다. 다음 찬송가를 많이 지어 주님 주신 은혜에 감사했다. 셋째, 선교사를 파송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바로 이때 온 선교사들이었다. “동부의 의젓한 가문 출신들로 대학교와 대학원 심지어 교수를 하던 인물들로 피가 끓던 젊은 인재들”로서 성령세례를 받은 이들이었다.

2. 언더우드 : 국교 수립과 기독교 선교의 연결고리를 포착하다

미국이 한국에 선교하던 시대는 은둔과 고립의 시대에서 동서양 교류의 개방 시대로 전환하던 때였다. 한국의 위대한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미 간 국교 수립이 곧 선교의 신호탄임을 포착했다. “1882년에 가서야 한국은 비로소 미국 해군의 슈펠트 제독에 의하여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서양 교회가 여기 들어와서 기독교의 신앙을 전파하라는 신호였습니다. … 이태가 지나서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사실상 똑같은 날짜에 한국에 도착한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국가와 국가의 교류가 곧 기독교 복음전파의 신호탄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한국과 미국 간 국교 수립이 벌써 2년 전인데, 기독교 선교가 이태 뒤인 1884년에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시간이 낭비된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이러한 명백한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순종하기까지 2년이 넘는 세월이 경과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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