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이야기] 선교사 집 유리창을 돌로 깬 소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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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全德基, 1876-1914) 목사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와 모친 임씨 사이에서 출생하여 일찍 조실부모하였다. 그래서 숙부 전성여 가정에 양자로 입적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며 성장하였다. 그가 청소년 시절에 반기독교 행위를 하다가 17세 때 선교사 주택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렸다. 그래서 그는 큰 벌을 받을 줄 알고 떨고 있었는데 스크랜턴(W.B. Scranton) 선교사가 전덕기를 불러 벌을 주거나 책망 대신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우리 집 유리창을 깨어 큰 잘못을 저질렀으나 내가 다 용서할 터이니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교사의 사랑의 말씀에 감동되어 그때부터 낮에는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시약소에서 일을 하였으며 그 후 선교사 가정의 요리사가 되어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배에 꼭 참석하였다. 그때부터 믿음이 점점 자라 상동교회에 출석하여 상동교회의 신도가 되었으며. 1896년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1898년에 상동교회 속장이 되었으며. 1901년에 권사가 되었다. 1911년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상동교회 전도사, 부목사, 그리고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또한 상동교회를 시무하면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대하여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하다가 폐병이 발생하여 고통을 당하였다. 그 후 105인 사건 때문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심한 고문으로 마침내 지병이 악화되어 1914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상동교회는 상동교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를 추모하는 인파가 전국 각지에서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두모면 수철리 묘지에 안장하였다가 그 후 일제가 강제로 그 유해를 화장하여 그 재를 한강에 뿌려 묘지조차 없이하였다. 그는 38세의 짧은 생애를 기독교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굵게 사신 선한 목자였다. 그는 그가 사역하신 상동교회를 넘어 한국 민족을 위하여 크게 헌신한 민족의 목사라고 하겠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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