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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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46) 

1893년 4월 28일 금요일 오전에 상주에서 쓴 배위량의 일기에 상주에 도착한 날 어렵게 방을 얻은 것과 동래에서 같이 온 마부 중에 한 명이 몸이 안 좋아 낙동에 남겨두고 온 이야기와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소년의 건강 상태도 점점 안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 후 “오늘 오전에는 책을 판매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배위량은 순회전도를 행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틈틈이 책을 번역했다. 사실 배위량은 대단한 문필가였고 번역문학가였다. 더욱이 그는 한글성경 번역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이다. 순례를 경험한 사람은 순례가 새로운 삶의 중요한 화력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울러 그 순례길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가까이에 늘 함께 하는 일상이 순례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130여 년 전에 행한 배위량의 순회전도 여행도 우리가 지금 행하는 순례처럼 힘들고 어려운 노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시절에는 필요한 것을 구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고 길도 더 반듯하다. 그리고 각가지 편의 시설도 더 다양하고 많다. 집 나가면 누구나 고생이란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배위량은 순회전도 여행길에 자신의 기본적인 일에 더하여 책을 번역하는 일을 행했다는 것이 매우 경이롭다. 미국에서 1891년 1월 29일에 조선에 들어 온지 이제 겨우 3년이 조금 더 지났는데, 한글로 책을 번역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배위량이 언어적인 감각이 있었겠지만, 그의 열성은 그를 성장시키는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배위량은 1893년 4월 27일 목요일 밤에 상주에 도착하여 5월 1일 월요일 저녁에 예천군 용궁(Ryonggyoon)에 도착했다. 용궁에 도착한 뒤에 쓴 일기에 상주와 관련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5월 1일 월요일 저녁, 용궁(Ryonggyoon, 상주와 예천 사이에 위치-역자주)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 상주에서 서울까지도 480리 길인데, 길 형편이 상주-서울 간 길이 더 좋다. 

일행 중 두 사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들어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보내주도록 이 지방 관리에게 요청해야만 했다. 이들은 분명 외국인을 거의 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서 전도사는 약 2만 명 정도가 온 것 같다고 했다. 가능한 많은 양의 책들이 배포되었다. 

관리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수차례 찾아왔고, 우리가 요청한 것을 들어주었다. 우리는 그에게 1달러에 670전 씩 모두 7달러를 팔았다. 

나는 관리의 보호 하에 마부를 맡기고 상주를 떠나야만 했다.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열이 심했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우리의 경제적 형편으로도 상주에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약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소년은 오한이 났으나 좀 괜찮아졌다. 상주에서 마부 한 사람을 충원했는데,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씩 주기로 했다. 

배위량은 1893년 5월 1일 월요일 저녁에 예천군 용궁에서 상주에 대하여 쓴 일기를 탁지일이 번역한 일기에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 상주에서 서울까지도 480리 길인데, 길 형편이 상주-서울 간 길이 더 좋다.”는 언급이 있다. 그런데  배위량 <일기 1차본>의 생성자인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한 Richard H. Baird, William M. Baird of Korea : A Profile (Oakland: Calif., 1968), 34에는 아래 배위량 일기의 사진에서처럼 상주와 부산 그리고 서울에 관한 언급이 없다. 

배위량 <일기 1차본>의 글은 다음과 같다. 

Were compelled to apply to the magistrate for a servant to keep the people away. They evidently have seen few foreigners. 

The people were estimated by Suh at 20,000.

그렇다면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 상주에서 서울까지도 480리 길인데, 길 형편이 상주-서울 간 길이 더 좋다.”는 언급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배위량의 수기로 된 일기가 발견되어 숭실대학교에서 간행된 <일기 2차본>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Were compelled to apply to the magistrate for a servant to keep the people away. They evidently have seen few foreigners. 

Sang is 480 li from Fusan and the same from Seoul, but had a better road to Seoul. 

The people were estimated by Suh at 20,000. 

It is situated in a large plain and surrounded by a good number of villages.

여기서 보면 1968년도에 편집된 <일기 1차본>에는 없는데 배위량의 수기 일기인 <일기 2차본>에 첨가된 글이 다음과 같다. 

Sang is 480 li from Fusan and the same from Seoul, but had a better road to Seoul. […] It is situated in a large plain and surrounded by a good number of villages.

이상규는 위의 일기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 […]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앞에서 필자는 배위량이 영남 내륙지역을 순회전도한 제2차 순회전도 기간에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이름이 한성 또는 한양으로 불렸다는 것을 말하면서 한성을 서울로 지칭하는 배위량의 수기 일기인 <일기 2차본>은 원본이 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비록 수기로 된 일기라 겉으로는 더 원본 같고 또한 고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1968년도에 리차드 베어드에 의하여 편집된 배위량의 <일기 1차본>보다 <일기 원본>에서 멀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만약 배위량의 <일기 원본>이 존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면 리차드 베어드에 의하여 편집된 배위량의 <일기 1차본>이 수기 일기인 <일기 2차본> 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

<일기 2차본>에는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진 곳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동일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길이 훨씬 좋다.”고 하면서 배위량의 <일기 원본>에 지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더 명확하게 하고,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여기서도  <일기 2차본>은 ‘한성’을 ‘서울’로 지칭한다. 이것만 봐도 배위량의 수기 일기인 <일기 2차본>은 배위량이 제 2차 순회전도 여행을 나온 1893년 4월 14일부터 5월 18일까지 쓴 <일기 원본>이 아니라, 후기에 생성된 수정된 일기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일기 2차본>은 상주의 지리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더 잘 설명한다. “그곳은 넓은 평원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은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일기 2차본>이 언제 생성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한성(또는 한양)’을 서울로 지명 변경을 했던 1946년 8월 15일(당시는 지명은 ‘경성’)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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