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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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머님께는 교통비라도 드렸으나 아버지에게는 드려보지를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어려움을 잘 이기시는 분으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면서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아버지께 ‘작은 용돈이라도 드렸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

여러 해를 고생하시던 부모님께 동생(영숙 권사)이 늘 도왔었고 동생의 도움으로 집도 마련하시고, 하나뿐인 아들도 결혼하고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계셨다. 어느날! 갑자기 여동생 혜숙이가 대학원 졸업 논문 준비로 빈방에서 혼자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몇 달을 누워 계셨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셨고, 아버지는 눈이 오면 빗자루를 들고 모란공원에 가셔서 딸의 묘에 덮인 눈을 쓸고 오시고, 묘소를 자주 가셨다. 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셨던 부모님 마음 얼마나 아프셨을지!

그 후 아버지께서는 결혼 이후로 안 나가시던 교회를 나가시기 시작했고 어머니께서 교회 봉사 하시는 것을 돕기도 하셨고, 장안동 장안교회를 목사님께서 개척하실 때 어머님과 같이 목사님을 도와 천막도 쳐 드리며 많은 봉사를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집사직도 받으셨다.

아버지의 고난의 터널은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말씀도 못하시고 누워 계셔서 병간호를 6년이 넘도록 하시며 많은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께서 하늘나라 가신 후 아버지께서도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도 하시고 담석 수술도 하시며 많은 고생을 하셨다. 

딸들은 다 출가했고 외아들인 남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며느리 이난영 권사가 부모님 병간호로 많은 고생을 한 것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서로 성격과 취향이 달라서 다투기도 하시며 힘들게 사셨으나 자식을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희생을 하셨다. 부모님께서 8.15 해방되고 38선을 넘어와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5년이란 세월도 자녀를 위해 모진 고생을 다하시며 버티셨고, 6.25전쟁 속에서 자녀들을 먹이기도 어려운 중에 7남매를 아픈 화숙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까지 보내주신 부모님의 헌신에 눈물로 감사를 드린다.

어머님은 딸을 6명이나 낳으셨다고 친가 가족들이 어머니를 외면하였으나 굴하지 않으시고 딸들을 차별없이 길러 주셨고, 어머님의 신앙으로 자녀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기도와 찬송으로 사셨던 어머니! ‘주안에 있는 나에게’(370장)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445장)를 항상 부르셨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 찬송을 부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린다.

6년이란 세월을 중풍으로 말씀도 못 하시고 고생하셨던 어머니! 어머님은 나에게 손짓으로 ‘나 대신 다리가 튼튼할 때 주의 일을 해라’라고 하셨고, 운명하실 때도 환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신 채 눈물만 흘리시며 입만 벙긋 벙긋 ‘간다 간다’ 표현하시던 모습! 늘 생각이 난다. 아픈 동생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며 사셨던 어머니! 그 동생이 아직도 살아 있어 막내 완숙 권사가 모든 것을 돌보고 있고, 미자 집사와 조카인 병직이도 같이 돌보고 있다.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서 가슴 아파하시며 기도하시리라 믿는다. 남동생 함 목사는 누나들이나 동생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 주었고 큰 매형과 나를 부모처럼 의지했던 동생이었는데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부모님 곁으로 먼저 갔을까! 늘 보고 싶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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