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한국교회와 부녀자 전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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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7년 정동예배당에서 남녀 동등문제를 토론하다

처음 지어진 한국교회는 ‘기역자(ㄱ)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교회 건물을 기역자 모양으로 지은 이유가 있다. 이편과 저편이 서로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역자의 꺾어지는 부분에 목사가 서는 강대가 있어서 목사만이 양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자석에서는 여자석을, 여자석에서는 남자석을 볼 수 없도록 한 건물 모양이 바로 기역자 교회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문화의 기역자 교회에서도 예수를 믿었고,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예수 문명의 개화된 선진사회로 한국을 이끌고 나갔다.

남녀 동등문제로 토론회가 열린 곳도 다름 아닌 교회였다. 1897년 서양식 건물로 아름답게 지어진 정동예배당 지금의 정동제일교회에서 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주제는 놀랍게도 ‘남녀 동등문제’였다. 이런 혁신적인 문제 토론이 가능했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 연사로 나선 이는 서재필과 윤치호였다.

“하나님이 세계 인생을 나으실 때에 사나히나 여편네나 사람은 다 한 가지라. 여자도 남자의 동등권을 가져 인생에 당한 사업을 다 각기 하는 것이 도리어늘 … 그러하거드면 나라이 더 부강하고 집안이 더 태평할 터이니, 그럴 지경이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남녀의 동등권 그 근간은 하나님의 창조이다. 그리고 각기 인생에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 있다. 그 결과는 나라의 부강과 집안의 태평으로 아름다운 세계가 열린다. 이것이 주요 골자이다. 인본주의 소위 말하는 사람 중심의 독선적이고 허황한, 창조질서를 거부하는 무조건적 남녀평등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2. 부녀자 전도와 미신 타파

언더우드는 그의 선교보고서 『와서 우릴 도우라』에서 한국의 종교를 다루고 있다. 거기 흥미 있는 이야기를 써 놓는다. 한국의 종교는 유교인데 이는 남자들, 상류층의 종교이다. 불교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하류층에 퍼져 있다. 그러나 무속신앙 샤머니즘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유교를 신봉하는 상류층의 남자라고 할지라도 무슨 급박한 일이 생기면 무당을 찾고 미신을 찾는다는 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굿에 드는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1897년 선교사들이 낸 통계를 보면, 한국의 농토 평가액은 430만 달러, 정부의 1년 세입은 400만 달러였다. 그런데 굿에 드는 연간 비용은 1200만 달러였다. 곧 모든 농토를 1년에 세 번씩 굿에 없앴다는 말이요 나라 살림의 세 배나 되는 돈을 굿하는 데에 탕진했다는 말이다. 비참한 조선의 실상이었다.

이 비극적인 나라에 복음의 참된 빛이 비취었다. 교회와 선교사들은 부녀자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무당 미신이 ‘마음이 약한 여인네’에 파고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언더우드의 보고서대로 한다면, 예수 믿지 않는 모든 한국인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혼돈, 공허, 흑암의 사탄의 세력에서 한국인들을 해방한 것, 그것이 바로 교회와 선교사들이 한 일이었다.

류금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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