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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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지(外地) 전도부 부장은 차재명 목사였으며 사무국장으로 변린서 목사가 시무하면서 장로회 총회의 중화민국 산동선교 업무를 처리하였다.

총회 외지 전도부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선교사 4명 가운데 총승한, 이대영 목사를 소환하였으나 이대영 목사는 경북 노회장 청원에 의하여 유임되고 총승한 목사는 결국 선교사직을 마치게 되었다.

방지일(方之日) 목사의 고모부가 되는 홍승한 목사는 1917년부터 중화기독교 교동(膠東)노회에 소속되어 중국노회 노회원 자격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파송 산동 선교사 자격으로 활동하다가 선교사직을 마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 평북노회로 이명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목회와 교계 활동으로도 분주하였거니와 양실학교 교육사업을 위하여 많은 애를 썼으며 이동욱(李東郁) 씨와 어려운 양실학원 유지비용 모금을 위하여 사방을 다니며 동정(同情)을 호소(呼訴)하였다.

김영훈 목사와 이동욱 씨의 노고에 감명 받은 시대일보(時代日報)의주지국의 한 기자는 ‘지방논단’이란 글을 통하여 양실학원의 어려운 실정을 널리 알려 유지들의 가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1924년도 가을로 접어들면서 의주 서교회는 11월 12일에 김영훈 목사 사회로 추수감사절 예배를 거행하였다.

감사절 예배에는 남녀 교우 400여 명이 참석하여 곡식과 금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저녁예배는 의주 동교회와 서교회 교인들이 연합하여 1,00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청산유치원 어린이들의 찬양무도와 양실학원 남녀 학생의 연설 그리고 창가(唱歌) 등으로 다채로운 순서를 갖기도 하였다.

1924년이 지나고 1925년에 이르러서도 김영훈 목사는 서교회와 양실학원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1925년에 이르러서도 김영훈 목사는 서교회와 양실학원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1925년 9월에 개최된 제14회 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총대로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외국전도부(1년조) 위원, 신학교육부(2년조), 사기(史記) 검열위원 직책은 유지하고 있었다.

김영훈 목사는 한학자요 서예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1925년 12월 기독신보(基督申報)에는 그의 서예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김영훈 목사가 소속된 의산노회는 성경학교 기성회를 조직하고 일반 교역자들이 합동하여 일하던 중 1926년 2월 23일에 의주(義州) 비현예배당에서 제1회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정하였으며 회장에 한석진 목사, 부회장에 김영훈 목사가 선출되었다.

의주 서교회는 1926년 5월 9일에 성찬식과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모든 교회가 해마다 성찬식과 세례식을 거행하지만 의주 서교회의 성찬식은 당시 신문에 보도가 되어 그 면모(面貌)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의주 서교회의 학습, 세례식은 김영훈 목사의 주례로 거행되어 남녀 60명이 학습교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33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400명이 성찬식에 참여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26년 9월 11일부터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서 개회된 제1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노회장 한석진(韓錫晋), 서기 홍하순(洪河順) 목사 외 여러 총대들과 참석하였으며 함태영, 량전백 목사와 총회 사기 검열위원을 계속 맡았고 신학교육부 1년조 위원이자 신학교 이사, 총회 신학교육부장으로 수고하였다.

총회 신학교육부 임원은 부장 김영훈, 서기 김건우 그리고 림택권, 변린서 목사로 조직되어 있었다.

총회 신학교육부장 김영훈 목사는 총회에 신학교를 위하여 해마다 이천(二千) 원을 도와달라고 청원하였으나 유안(留案)되었으며 학사일정과 신학교 교수 현황 그리고 주기철을 포함한 1925년 추기(秋期) 졸업생 명단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1926년이 신학교 창립 25주년이 되는 해이며 설립자와 교수들이 계속 교수로 시무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교육부장과 이사로 활동하였거니와 1926년 9월 14일에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서 거행된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6회 졸업생회 정기총회에서는 간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제6회 졸업생회 정기총회는 회장 김성택 씨 사회 하에 김석창 씨 기도가 있은 후 신임원을 선거하여 회장 함태영, 부회장 리자익, 서기 송관범, 회계 김우석 씨를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간사부의 간사장이 되었으며 감사부 서기로 이승길 씨가 선출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회는 중국 남경(南京) 전도사업을 지원하였으며 신학교 졸업생들의 약사(略史) 편집 작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의산노회 서기 홍하순 목사는 김영훈 목사의 서교회에서 시무하던 분으로 그의 위임식은 1926년 가을에 거행되었다.

홍하순 목사의 위임식은 의주 서교회에서 500여 명의 교우들이 모인 가운데 한석진 목사의 사회로 거행되었으며 류여대 목사의 기도와 김석항 목사의 강연 그리고 내빈(來賓)들의 축사, 위임예식 순서로 진행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6년 가을에 의주 동교회에서 개최된 종교강연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으며 서교회 추수감사절 예배를 인도하였다.

서교회 추수감사절 예배는 김영훈 목사 사회로 개회하여 홍하순 목사의 ‘감사하다’는 제목의 설교와 남녀 학생들의 창가(唱歌)로 진행되었다.

1926년 12월 24일 밤에 거행된 서교회 성탄예배는 홍하순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김영훈 목사께서 설교하였다.

서교회는 성탄예배에서 드려진 헌금 120여 원을 빈민구제를 위하여 사용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의산노회에서 의주읍에 설립한 의산성경학교(義山聖經學校)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의산성경학교는 그가 시무하는 서교회 청년회관을 교실로 사용하였으며 1926년 12월 15일에 개학하여 1927년 1월 15일 방학하였다.

의산성경학교에 다니는 학생 36명(남자 17명, 여자 19명)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리문답 등을 공부하였으며 한석진, 류여대, 김영훈, 안승원, 정상인 목사가 강사로 활동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의주 서교회 목사(牧師)이자 양실학교 교장(校長)으로 열성을 다하여 활동하였고, 의산노회와 총회에서 중요 직책을 맡아 분주(奔走)하게 활동하였다.

1927년이 되면서 김영훈 목사는 양실학교 교장 직책을 사임하였다. 그의 후임으로는 서교회 동사목사인 홍하순 목사가 선택되었다.

중국 산동 선교사였던 김영훈 목사는 1927년 가을 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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