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학도병(6사단 민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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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숨어 있는 인민군들로 인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인민군들의 시체와 우리 국군의 시체가 들과 산에 그리고 길에도 말할 수 없이 많이 쌓여 있었다. 폭격에 맞은 기차 창문마다 시체들이 매달려 있어 군 트럭 뒤에 타고 다니면서 너무도 무섭고 끔찍해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기도 하면서 ‘내가 왜 지원을 했을까’ 후회도 했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상황과 무서움이 오히려 훗날 나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됐었다. 1개월 가까이 위험한 전투 속에서 지냈지만 대학생이었던 학도병 대표가 우리를, 특히 여학생 3명을 가족처럼 보호해 주며 지켜주어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분에게 늦게나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

밤 날씨가 춥던 어느 날 국군이 희천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어느 집 부엌에서 우리 여학생 셋이 불을 쬐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명숙아!“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큰 집 사촌 오빠였다. 오빠께서는 수송부에 중사로 근무하시면서 북진해 오셨던 것이었다.

오빠는 “네가 여기 웬일이니?”라고 소리를 치시며 “지금 중공군이 내려오는데  빨리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당장 내일 후방에 보급품 실으러 가는 군 트럭이 있으니 그 차로 여학생 모두 집으로 가라고 했다.

원주에서 온 두 여학생은 안가겠다고 해서 다음날 나 혼자만 보급을 실으러 가는 군용트럭을 타고 집으로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숨어 있는 인민군들로 인해 낮에는 다닐 수가 없었고 어두운 밤을 이용해서 트럭의 스몰 라이트만 켜고 천천히 달려서 춘천까지 이틀이나 걸렸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 나와 함께 학도병으로 갔던 여학생 중 한 사람은 만났으나 다른 한 사람은 소식을 못 들었다. 1차로 지원했던 친구들도 초산까지 갔다가 포로가 되어서 소식이 없는 친구가 2명이나 있다.

포로가 되자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져서 친구 유흥예는 한 달을 남쪽으로 걸어서 겨우 돌아왔다고 하고, 다른 친구 기숙이는 여자인민군 장교에게 잡혔으나 다행히 비교적 좋은 사람을 만나 남한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어서 고생은 많이 했으나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무사히 돌아온 친구들의 소식은 너무 반가웠지만 돌아오지 못한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작은 힘을 보탠 결과

작은 힘이었으나 나라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우리들의 헌신이 대한민국을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될 것 같아서 보람을 느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학교 교정에 우리들의 기념비를 세워준 국가에 감사했다. 그리고 춘여고 교장선생님, 동문회회장님, 보훈청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김계순 동창이 ‘백합 명비’에 시를 새겨 세워주어서 고마운 마음이다.

이 명비(銘碑)를 보며 자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한몫을 하는 여성들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며 우리가 닦아놓은 작은 일들을 발판으로 삼아서 나라를 위해 더 큰 일을 하고 춘천여자고등학교의 명성을 한국은 물론 온 세계에 펼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고 싶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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