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최대위 교장 선생님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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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4회 졸업생 함명숙입니다. 건강상태가 좋지를 않아 찾아뵙지 못하고 글을 드려 죄송합니다. 지난 5월 27일 강원도민일보에 여 학도병 참전 관련 기사가 실린 것 보았습니다. 하루 전에 전화로 인터뷰를 하면서 사진도 요구해서 보냈지요. 1면에 저의 기사가 실려 신문을 통해 최 교장 선생님의 존함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기념비 세우기 위해 많은 힘을 쓰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오직 나라를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지원했었던 것인데 나라에서 이 작은 일에 모교에 기념비까지 세워 주시니 고마운 마음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는 얌전하고 수줍은 여학생이었어요. 어머님께서 딸을 6명이나 낳으시고 서러움을 받으셔서인지 여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게 기르시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지요. 그래서 학도병도 어머님이 지원하라고 허락하셨어요. 저는 화천에서 일주일 도와주는 것으로 갔었는데, 국군을 돕는 인력이 부족해서 우리 학생들은 계속 군을 도우며 봉사를 했어요. 저는 강계 밑에 있는 희천까지 갔었지요.

처음에는 산속에 숨어 있던 인민군들의 습격에 떨었고, 사방에 쌓여 있는 시체들은 너무도 무서웠어요. 다행히 학도병들이 같이 생활하면서 보호해 주어서 힘이 되었지요. 저의 사촌오빠께서는 그 당시 6사단 수송부에 중사로 있었어요. 그런데 희천에서 그 오빠를 만났어요. 오빠께서 놀라며 지금 위험하니 집으로 가라고 하며 후방에 보급품을 실어 가는 차에 저를 태워 주었지요. 그 때 중공군이 몰려오기 시작했었고, 우리 국군이 조금씩 후퇴를 하려고 할 때였어요. 인민군들 때문에 이틀이 걸려서 집으로 올 수 있었어요.

전쟁이 끝난 후에 사촌오빠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나오자 다음날 제가 있던 부대가 포위되었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님이 아버지로부터 원망도 많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자신도 일주일 있다 온다고 하던 딸이 한 달이 넘도록 소식도 없으니 얼마나 힘이 들으셨겠어요.

하나님께 기도를 열심히 하셨다고 합니다. 그동안 어머님은 전투에서 싸우다 다쳤지만 입원실이 없어 입원하지 못하고 있는 경한 환자들을 집에 데려다 돌봐 주시고 계셨어요. 집이 춘천도립병원 근처에 있었으니까요. 몇 날이 지나지 않아 ‘1월 4일 후퇴’를 하게 되었지요. 가족과 함께 대구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강물(여울)에 옷을 벗고 건너도, 탄환 실은 기차 꼭대기에서 대구까지 눈비를 다 맞으면서 수일을 걸쳐 피난을 가도 가족과 함께 있어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이후 살던 지역을 수복한 후에는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졸업 후, 결혼도 하고, 춘천여중 교사로 있었지요. 시아버지께서는 춘천여자중·고등학교 교장님으로도 계셨고, 친정 아버지께서는 춘천중학교 교장님으로 계셨어요. 춘천의 생활은 남편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발령을 받으면서 끝나고 서울로 오게 되었어요. 서울에 와서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면서 피아노 교습도 하며 지냈습니다. 남편은 자연과학 교수였으나 취미로 글을 쓰다 보니 희곡 작가로 등단도 하고 오랫동안 문학 활동을 많이 하고 지내셨지요. 수년 전에 둘이서 모아 두었던 글들을 책으로 출판한 적이 있는데 한 권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교장 선생님! 방송국으로부터 모교에서 학도병 관련 촬영을 한다는 전화를 받았으나 지금 심장을 치료하고 있어서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협조를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정말 수고가 많으시고 감사합니다. 졸업생 함명숙 드림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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