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이순신 장군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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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지금부터 430년 전인 1592년 4월에 일어났다. 당시에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을 통과해야 하니 길을 빌려 달라는 말 같지도 않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20여만 명의 일본군은 4월에 부산에 상륙하여 5월에는 한성을 점령하고 6월에는 평양성을 함락시켜 선조를 의주로 몽진시키는 불행을 야기했다. 그러나 명의 참전과 미약한 정부군 그리고 오로지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심만을 지닌 의병들의 항전으로 결국은 저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간웅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은 1958년 그의 사망으로 끝났으며 7년간에 걸친 전란으로 국토는 황폐되었고 많은 국민이 죽거나 다쳤으며 심지어는 10만 조선인이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유능한 재상 유성룡이 민정과 군정의 최고위직에 있어 이 난관을 헤쳐 나갔고 그의 비호를 받은 이순신이 있어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거기에 ‘우리 의병들은 이름이나 이익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외치며 싸운 수많은 의병들이 있어 국가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으나 관운이 따르지 않아 1576년에 식년 무과에 합격하고 32세에 북방의 말단 수비 장교로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함경도에서 남쪽 바다까지 15년간 둔전을 관리하며 여진족과 왜구와 전투를 하면서 일선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쌓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낱 무관으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지만, 장인 방진과 후견인인 유성룡의 조언과 보살핌으로 전라좌수사로 발령을 받음으로 그와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다. 일찍이 일본의 침략을 예견한 그는 전함 건조 등 조선 수군의 전력증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권모술수를 모르고 강직한 그에게 고난이 따랐으니, 1587년에 여진족 기습공격에 대한 책임으로 백의종군을 하였고, 후에 정유재란 중에도 모함에 의해 다시 백의종군을 하기도 하였지만 전쟁의 끝 무렵에 그의 애국심과 능력을 높이 산 조정의 배려로 다시 병권을 잡기는 하였다. 세계 해전사에 우뚝 선 이순신은 최초의 옥포해전부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전승을 거두었다. 이는 무기 및 군선의 철저한 준비, 끊임없는 군사훈련 그리고 그의 탁월한 지형 조건을 활용하는 전술의 결과였다. 이로 인해 국가적 위기에 있던 조선은 해상에서는 물론 육상에서의 전투에도 영향을 끼쳐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특히 원균의 패배로 전멸하다싶은 후 마지막 전쟁인 노량해전에 임박해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라고 장궤를 올리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천재가 그의 천재성을 잘 활용해 획기적인 과학발전을 통해 세상이 발달하고 사회가 윤택해질 수 있음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서 잘 보았다. 이는 국가의 운명에도 부응하는 사실이니 한 사람의 걸출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에 의해서 나라가 발전할 수 있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결코 녹녹치 않음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일진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에 진정 이 나라를 여러 가지 난국에서 건져줄 이순신 장군이 그리워진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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