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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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순례단의 역사(3)

구미에서 상주까지 (53) 

밀양에서 상동역으로 가서 역무원들에게 유천역이 어디 있는지 물으니, 자기들은 모른다고 하면서 역앞의 가게에 가면 상동 노인들이 있을 것이니 그분들에게 문의를 하라고 일러 주었다. 역무원이 알려준 가게로 가서 어느 연세드신 노신사 한분에게 여쭈니 자신은 상동 출신이고 여기서만 살았는데, 원래 옛날에는 이 지역 전체를 유천이라고 불렀는데, 유천이 밀양유천과 청도 유천으로 나뉘어졌다고 일러 주었다. 즉 옛날에는 청도 유천과 밀양 유천을 모두 유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밀양 유천은 지금 상동면이 된 사실과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 일대를 청도 유천으로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옛날에 유천역이 밀양강 저쪽 건너편에 있었는데, 청도에서 밀양으로 가는 경부선 철도 노선을 직선화하면서 유천역을 폐하고 상동에 상동역을 새로 만들었다고 일러 주었다. 

그날 옛날 유천역 자리를 찾아 가지는 못했지만, 유천역을 이어받은 상동역을 방문한 것이 좋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청도역으로 갔다. 청도역에 차를 세워두고 청도에 유명한 납작바위(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를 물어 찾아 갔다. 옛 이야기와 옛 사람들의 정취가 아직 남아 있는 납작바위를 찾아본 것도 좋았다. 다음으로 대구와 경북의 경계선인 팔조령으로 갔다. 팔조령 옛길의 정상 부분인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 부분 청도 쪽 산록 면에 청도 기독교 연합회에서 청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그 기념비에 배위량이 청도에 들어온 기점을 청도 선교의 원년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완영 장로는 필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밀양역으로 와서 상동과 청도를 거쳐 팔조령까지 왔지만, 또 다른 약속이 있어 이젠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함께 대구로 같이 가든지 팔조령에서 대구로 걸어서 오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그에게 “장로님, 먼저 가세요. 나는 여기 조금 더 있다가 기념비를 좀 더 찬찬히 본 뒤에 팔조령에 오기도 쉽지 않을 듯하니 청도 사람들이 청도 선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우고 배위량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팔조령 저쪽 청도 땅을 좀더 살펴보고 가겠다”고 하니, “교수님 무슨 말씀 하십니까? 여기에는 차도 안 다니는데, 대구로 어떻게 가시려고 하십니까? 저하고 같이 대구 가시고 다음에 와서 같이 걸으시지요”한다. 그래서 “이렇게 나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걷는 일은 잘하니, 여기서 가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대구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올 것이니 거기까지 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대구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여기가 팔조령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걸어가려고 하십니까. 마, 다음에 걸으시고 저하고 같이 가입시더”라고 하여 “사실 장로님 저와 밀양역에서 청도역까지 걷고 청도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기차로 가기로 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장로님의 다른 약속 때문에 순례할 시간이 많지 않아 차를 가지고 오셔서 여기까지는 차로 순례길을 살피는 일을 했지만, 순례는 기본이 걷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걸어 봐야 순례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니 사람 좋은 김완영 장로는 팔조령에 필자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이번에 같이 가시지요하면서 자꾸 같이 집에 가자고 나를 설득한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걷는데, 이미 이력을 가진 사람임을 말했다. 어릴 때 10리가 넘는 학교 길을 걸어 다녔고, 독일에서 공부할 때 돈이 없어 다른 도시에 있는 한인교회에 설교하기 위해 주일에 그 교회에 갈 때 기차비를 아껴 한 주 간의 밥을 먹기 위해 50리 길을 걸어서 가고, 50리 길은 기차를 타고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숙사로 돌아올 때도 50리 길은 걸어서 오고, 50리 길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교회에 가기 위해 하루에 100리 길을 걸어 다녔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2015년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40여 일동안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정도 되는 길을 모두 걸어서 완주한 이야기를 하니, “아 그러면 됐습니다. 교수님 선택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교수님 여기서 대구까지 까마득한 길을 걷는다고 괜한 고집부리신다고 생각하고 같이 대구로 가자고 말씀드렸는데 걱정안해도 되겠습니다. 좋은 순례길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먼저 갔다. 나는 팔조령에서 청도땅을 내려다 보면서 까마득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어두운 시절에 이곳을 지나다가 분명히 배위량도 이 근처에서 쉬었을 텐데, 그가 청도땅을 내려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묵상했다. 

팔조령은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지금은 팔조령에 터널이 생겨 청도 사람들의 대구 나들이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수년 전 언젠가 한 번 어떤 지인과 청도 어떤 곳을 방문하고 대구로 돌아올 때 그날 청도로 갈 때는 청명한 날이었는데, 대구로 갈 때는 팔조령에 눈이 많이 와서 우리가 탄 차가 엉금엉금 기어서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돌아갔던 생각이 났다. 그 날 그 눈 때문에 팔조령을 넘지 못한 차들도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 길을 내가 지금 이시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참 너무 신기했다. 내가 팔조령을 처음 도보로 넘었던 그 날은 유난히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드러낸 날이었다. 그간 짓눌렸던 마음이 팔조령 길을 걷는 동안 상쾌함을 느꼈다. 

배위량이 걸어서 넘었던 그 길은 이 길이 아닌 다른 옛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옛 사람이 걸었던 길을 내가 지금 오늘 걷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신기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배위량이 넘었다고 생각되는 그 길이 팔조령 옛길이 아니다. 그 길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산으로 변했다면 그 옛날 팔조령 길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많은 비용문제도 있을 것이고 생태학적인 연구 조사와 타당성에 대한 연구가 역사 문화 지리적인 연구와 함께 선결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분명히 배위량이 넘었던 그 옛 길은 당시 사람이 많이 다녔던 길일 것이다. 그 길은 지금의 팔조령 옛길보다는 좀더 짧지만, 가파른 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길로는 차가 다닐 수 없으니 팔조령 길에 기반을 두고 신작로를 만들어 사람도 다니지만 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옛날 팔조령을 대신해 팔조령 길로 불리다가 지금은 그 길도 옛길이 되었다. 터널을 만들어 산을 넘지 않고 대구 달성과 경북 청도를 관통하는 큰 길이 생겨 그 팔조령 길은 옛길이 되어 시인과 예술가와 자전거 동호인들이 선호하는 길이 되었다. 

배위량 순례길은 물론 배위량이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직접 경험한 길을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옛길이 철도가 되고 고속도로가 된 부분도 있고 도로를 직선화하면서 그 길을 산으로 복원한 부분도 있고 농지로 복원한 부분도 있고 지금도 옛길로 남아 있는 길도 있다. 순례를 자동차로도 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타고 할 수도 있다.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각자의 상태와 취향에 맞게 순례를 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순례라도 도보순례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도 여러 형태의 순례가 있지만, 도보 순례가 기본이고 100km이상 도보 순례를 하게 되면 순례 완주증이 나온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100% 정해진 길은 없다. 늘 변해 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할 수 있다. 필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당시에도 옛 순례길을 막고 새로운 순례길을 만드는 공사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옛 순례길이 역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중요하지만, 인간에게는 또 다른 필요성이 대두될 때 무엇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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