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아내 초청 <2>

Google+ LinkedIn Katalk +

한국에서 아내는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6월에 다음 학기 장학금이 확정됐는데도 서류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를 부모님께 맡기기는 너무 죄송해서 아내와 막내아들 두 사람의 초청장을 받기 위해 I-94 형식을 시카고에 보내 공관 확인까지 받았으나 문제는 $3,000이라는 은행 잔액증명이었다. 교회에 부자 의사들이 있었지만, 그만한 돈을 빌릴 처지가 못 되었다. 송 목사는 자기가 잘 아는 김장환 목사의 처남에게 재정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하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허브(Herbert Stephen), 그는 무척 바쁜 분이라고 했다. 모텔을 7개나 가지고 있고 아파트도 여러 개 있어서 정신이 없는 데다 어린애는 15살부터 1살까지 8명이나 되어 말을 해도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어찌 됐든 나는 초조했지만, 재정보증서는 쉽게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송 목사는 자기도 유치원생 큰딸과 둘째 그리고 갓난애까지 애 셋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과 사모를 데리고 나와 함께 허브가 사는 미시간 최북단에 있는 수세인 마리(Sault Ste. Marie)까지 가자고 했다. 거기까지는 승용차로 6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사모님이 불평하지 않고 따라와준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휴게실에서 쉰 다음에 나더러 나머지 길은 운전하고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운전면허증도 없을 때였다. 내가 고속도로에서 어떻게 그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는 그렇게 겁이 없었다. 오직 한번 놀랐던 것은 그들이 이사하게 되었을 때 허브가 잘 되었다고 자기가 마침 자가용 비행기를 샀는데 시험 삼아 자기네 이삿짐을 날라 주겠다고 왔을 때였다고 한다. 이삿짐을 싣고 떠올랐는데 어찌나 가슴이 떨렸는지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계속 기도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어떻든 나는 운전을 사양하고 송 목사가 계속 운전해서 허브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그가 재정보증인이 되어주어 아내를 초청하게 됐다. 

드디어 10월 1일 아내가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그동안 부부 아파트를 예약하고 아내가 분명히 온다는 증거로 아내의 여권 사진, 항공권 구매 사본 등을 제출해 구내 체리래인(Cherry Lane)에 있는 2층의 부부 아파트를 예약했다. 한국인 촌에서는 내 가족이 온다고 요란했다.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박 선생이 자기가 직접 공항까지 나가 모셔 오겠다고 친절을 베풀었다, 후에 들으니 그는 주차 공간이 없어 위법 주차를 하고 위반 티켓을 받았다고 했다. 미안한 일이었다. 특히 같이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수고하였다. 아내는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고 영어도 잘 모르는데 미아가 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녀는 미시간의 환상적인 가을 풍경에 넋을 잃었다. 

10월 10일 아직 미국 생활에 익숙해 있지도 않은데 우리는 랜싱 한인침례교회의 의사인 장 박사 댁에서 이른 저녁 초대를 받았다. 식사 후 대학 음대 강당에서 한국 빈 소년합창단 23명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황홀한 광경들이었다. 특히 장 박사 댁 저녁 초대에는 참석 교인마다 선물을 가지고 모였는데 그것이 다 우리 새살림을 돕기 위한 선물들이었다. 그것은 ‘이사 샤워’라고 했다. 흔히 미국에서는 결혼하는 사람이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백화점에 그 물품을 알려 놓으면 백화점은 이 선물들을 전시하고 하객들이 다 하나씩 사주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결혼 샤워(wedding shower)’라고 한다. 그런데 한인교회의 송 목사님은 있지도 않은 ‘이사 샤워’를 만들어 우리 부부를 도우려고 이런 이벤트를 꾸몄다. 

우리는 그렇게 이웃 학생들과 교회 교인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아내와 나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부부 아파트에서 새 유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