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26) 우남 이승만 ⑤

Google+ LinkedIn Katalk +

‘국제연맹’에 독립 탄원할 전권 대사로 파견

외교적 노력, 김구와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서 잡지 <한국 태평양(Korean Pacific Magazine)>을 창간,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를 펼치며 기독교 신앙으로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1917년 안창호와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에서 본토로 갔다. 2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의논한 후 한인대회를 열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승만은 모든 임시정부에서 주요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최고 수준의 학력과 오랜 경력의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1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령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 및 외무총장(國務 及 外務總長)”으로 추대했다. 뒤이어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 지명으로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는 최고의 자리인 집정관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대통령에 추대되었다. 상하이 현지로 부임하기 위하여 중국인 시신을 나르는 배 밑에 숨어 상하이로 갔다. 상해 임시정부는 좌우 합작 정부였다. 1921년 임시정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과 무단파로부터 불신임을 받았고, 1925년에는 임시 의정원에서 대통령 탄핵을 받았다. 그는 5월 17일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때문에 상하이를 떠난다는 고별교서를 임시 의정원에 남겼다.

1932년 11월 임시정부는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 대사로 이승만을 파견했다. 그해 12월 제네바에서 외교 활동을 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1934년 10월 8일 뉴욕에서 결혼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에 유학했고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취득했고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며 속기와 타자의 특기 보유자였다. 1941년 영문으로 쓴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뉴욕의 출판사 플레밍 H. 레벨 사(Fleming H. Revel Co.)에서 출간했다. 이 책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지 몇 달 안 되어 그의 예언이 적중했으며 책은 베스트셀러 했다. 1942년부터 “미국의 소리방송(VOA)”에서 육성 방송을 시작했다.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은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고, 대한민국은 독립하게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