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21) 조국에서의 목회 활동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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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계속된 마산교회의 분쟁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게 되었다.

독립파 교인들은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결의하고 1928년 9월 30일부터 신축 예배당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독립파로 나간 장로 가운데 손덕우(孫德宇) 장로가 있으며 독립파 교인들은 독립교회로 있다가 후에 기독교 감리회에 가입하여 마산 창동 소재 중앙감리교회가 되었다.

마산을 다녀온 그해 여름 7월 3일부터 9일까지 김영훈 목사는 의주군 송장면 금강동 금광사(金光寺)에서 개최된 의산노회 교역자 수양회(修養會) 사회를 맡아 진행하기도 하였다.

교역자 수양회에는 의산노회 40명 회원이 참석하였으며 오전에는 리정로 목사가 로마서(羅馬書)를 강해하였으며 오후에는 강연회와 간담(懇談) 및 토론(討論) 그리고 음시(吟詩) 순서로 진행되었다.

김영훈 목사 역시 한시(漢詩)를 읊기도 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한시(漢詩)와 서예(書藝), 그리고 묵화(墨畵)를 잘 그렸던 인물이다.

1927년, 황해노회에서 중국 산동 선교사업 철폐(撤廢) 문제가 거론될 때에 그 건의에 적극 찬동하였던 안악(安岳)의 김경하(金京河) 목사는 1999년에 발행된 그의 회고록에 김영훈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김영훈 씨는 풍신이 보기 좋게 잘생긴 여운형 씨 타입이었고, 한문글씨를 잘 쓰는 필객(筆客)이었다. 우리 총회에서는 그가 중국인들에게 우러러보일 만큼 풍신이 잘났고 글씨도 잘 쓰므로, 중국인 상대에 적격자로 인정하고 선교사로 파송하였던 모양이다.”

1937년부터 1957년까지 중국 산동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방지일(方之日) 목사 역시 김영훈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김영훈 목사께서만은 한시에 능하여 중국 사람들과 필담도 하시고 중국 사람들과 식당에서 식사도 때론 할 기회가 있었다 한다.”

1928년 기독신보(基督申報)에 김영훈 목사의 한시(漢詩)와 서예(書藝), 그리고 묵화(墨畵) 작품이 소개되어 남아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영훈 목사는 1928년 9월 7일부터 대구부(大邱府) 신정예배당에서 개최된 제17회 장로회 총회 개회예배를 인도하면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개회 선언하였다.

제1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임원선거를 실시하여 회장 렴봉남, 부회장 리인식, 서기 홍종필, 부서기 정일선, 회록서기 리학봉, 부회록서기 김길창, 회계 리춘섭, 부회계 김동원 제씨를 선출하였다.

다음 날인 9월 8일에 신구(新舊)임원 교체식을 거행하였으며 회중이 박수로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김영훈 목사는 총회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내려놓고 맡은 부서의 임무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신학교육부 부장 직책을 맡고 있어서 9월 11일에 신학교육부 보고를 하였으며 그대로 채용되었다.

총회 신학교육부는 부장에 김영훈 목사, 서기에 변린서 목사로 조직되었고 이사(理事)는 3년에 김영훈, 2년에 리자익, 1년에 변린서 목사로 허락을 받았다.

신학교육부장 김영훈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평양 장로회 신학교는 1927년 9월 20일 개학하였으며 본과 76명, 연구과 6명이 재학하였고 일본신학교를 졸업한 학생 3명 가운데 2명은 1개월, 1명은 3개월간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7년 가을에 캐나다 장로회 멕오드림 목사, 중국 선교사 스캇시와 맥나린, 중국 산동 선교사 박상순 목사가 신학교를 방문하여 특별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신학생들이 많은 은혜를 받기도 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신학교 학생회 주최로 왕길지, 곽안련 선교사의 선교 2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곽안련 선교사는 1928년에 안식년을 당하여 6월 10일에 귀국하였다.

감용훈 목사는 신학교육부 부장의 직책을 잘 수행하였으며 또한 금강산 수양관 건축기성위원회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도 수고하였다.

금강산 수양관 건축기성위원회 위원장은 한석진 목사였으며 서기에 홍종필, 실행위원은 한석진, 함태영, 김영훈, 차재명, 홍종필(총회 서기)로 조직되었다.

위원장 한석진 목사는 총회에서 출간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판권을 금강산 수양관 건축기성위원회 건축비 보조로 허락을 요청하였으며 그대로 가결되었다.

1928년에 김영훈 목사는 총회장 직책을 잘 마쳤으며 신학교육부장, 금강산 수양관 건축기성위원회 실행위원, 총회사기 검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교회사기(敎會史記) 검열위원장 량전백 목사의 보고를 살펴보자.

“一, 작년 총회에 보고한 바와 여히 교회사 제1편으로 3편은 교섭위원 차재명 씨에게 위탁하여 당국에 발행허가를 얻어 1만 부를 창문사에 인쇄하온바 편집급(及) 발행은 총회 대표로 하려고 하였으나 당국에서 불허함으로 차재명 씨의 명의로 출간하였사오며,

二, 제四편은 금년 하기에 마산에 회집하여 다 마치려 하였으나 위원중 김영훈 씨는 내환과 가사로 인하여 상약한 시기에 출석치 못하고 길종수 씨를 임시 대리케 하였삽더니 해씨도 역시 十五 일이 불과하여 친환을 위하여 돌아감으로 경성 차상진 씨를 청하여 오게 되었고 인쇄에 대한 교정의 불편과 시급함을 인하여 위원중 함태영 씨를 출장케 됨으로 二十九 일만에 검열의 역을 마치었사오며”

1928년에 발간된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 서언(序言)은 양전백(梁甸伯) 목사가 기록하였으며 총회 대표 이름으로 발행하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자의 불허로 저자(著者) 겸(兼) 발행자(發行者)를 신문내교회(新門內敎會-새문안교회) 차재명(車載明) 목사로 하여 발간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30년 8월 20일자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하권(下卷)’에 한문(漢文) 문장으로 교회사기후(敎會史記後)를 기록하였다.

김영훈, 함태영, 량전백 목사는 ‘朝鮮예수敎長老會 총회 사기(史記)’ 수정위원으로 수고하였던 인물들이다.

1930년 7월 18일부터 8월 22일까지 사기 수정위원회가 소집되었으나 위원 가운데 량전백 목사는 신병(身病) 때문에 불참하였으므로 김영훈, 함태영 목사 두 사람만이 중국 안동현에 회집하여 장로교회사(長老敎會史) 제4편 수정작업을 하였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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