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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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6월 20일 미시간 주립대학이 위치한 이스트랜싱을 떠나 도중에 3박을 하고 우리는 무사히 댈러스에 도착하였다. 박 박사는 오스틴으로 떠나고 우리는 민 집사의 환대를 받고 2주 가까이 그 집에서 묵었다. 민 집사 내외는 한국에서는 같은 교회를 다니던 친구였다. 그들은 내가 유학 오기 전부터 이민 와서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인 김 집사는 차 보험회사 대리인이었다. 

이곳은 북쪽과는 달리 한국 사람들이 무더기로 살고 있었다. 만 오천 명은 된다고 했다. 한인교회도 여러 개 있었고 한국 식료품상을 비롯한 샌드위치, 도넛가게, 세탁소, 봉재, 옷가게, 구두수선, 자동차 정비, 한약방, 이발사, 사진관, 심지어는 용접공, 빌딩 청소부까지 온갖 업종에 한국인들은 종사하고 있었다. 화이트칼라와 학생들만 있던 북쪽과는 판이한 현상이었다. 댈러스는 우리가 살던 학교촌인 이스트랜싱과는 다른 인구 95만의 대도시였다. 그리고 모두 흩어져 살아서 그렇지 하나의 작은 한국촌이었다. 북쪽 사람들은 남쪽은 덥고 사람 못살 곳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곳은 품팔이 일꾼들이 모여든 서울처럼 북적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던 때가 금요일이었으므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학교와 직장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나는 내가 공부를 계속할 대학을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가 학교를 알아보는 동안 전동식 재봉틀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는 댈러스 한인교회의 송 목사 댁에서 전동식 재봉틀로 시간이 나는 대로 연습을 했다. 공교롭게도 송 목사는 기전여고에서 교목으로 나와 함께 있던 분이었다. 목사 사모는 이제 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아주 좋아하였다. 나는 댈러스를 중심으로 반경 80마일을 잡고 그 안에 있는 대학들을 탐색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했다. 수학에 학위과정을 할만한 대학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학에서는 새 학기 지원접수가 끝났기 때문에 장학금을 줄 수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한 학기 동안 채점 조교로 일할 수 있게 해 주고 다음 학기에 장학금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채점 조교도 등록금을 면제해 준다니 그것도 큰 혜택이었다. 댈러스에서 45마일쯤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먼저 원서를 냈다. 

다음은 직장을 찾는 일이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곳을 다 돌고 신문을 뒤져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미스터 파인(Mr. Fine)이라는 재봉회사였다. 공장장은 우리를 면접하고 우리를 쓰겠다고 환영하였다. 아내는 재봉사로 나는 창고의 재고 정리를 하는 노동자로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민 집사는 이곳에 오래 사는 사람도 미국인 공장에는 취직이 잘 안 되는데 와서 얼마 안 되어 취직되었다고 기뻐하였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처럼 일이 순조로웠다. 바로 그 근처의 어빙(Irbing county)에 집을 구하고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카드에 펀치를 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매 주일 집으로 가지고 돌아오는 돈은 $260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앞날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어느새 우리는 한국에 두고 온 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딸에게 편지를 썼다. 

“…지희야. 대학 입학 때문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평안한 마음으로 공부하도록 해라. 학교 성적과 관계없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지망하도록 해라. 불합격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떨어지면 미국에 와서 우리와 함께 공부하자. 부모 밑에 있으면 신경이 안정되어 모든 것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애를 한국에 두고 송금하는 것보다는 곁에 두고 함께 공부시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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