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언더우드 2세와 6.25 전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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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반도에 들어선 미국 군정과 소련 군정, 그 주안점의 차이

이른바 전교조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들은 6.25를 남한이 북한으로 쳐들어간 북침 전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또한 지금 있는 주한미군은 해방 이후 한국에 들어온 점령군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대신한 미제국주의로 알고 있다고 하니 역사 왜곡의 파렴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6.25 사변은 해방 이후 계속해서 전쟁을 준비한 소련 군정의 결과물이었다. 즉 남침이었다. 그리고 미국 군정은 김일성 괴뢰도당을 세워놓은 소련 군정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탄생과 함께 한반도에서 다 떠나갔다는 것이 사실이다.

언더우드 2세의 책 「고난을 이겨낸 비전의 나라 한국 Tragedy and Faith in Korea」은 6.25 남침 직전 38선으로 나뉜 대한민국과 북한의 상반된 상태를 잘 증언하고 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한반도의 남과 북을 나누는 경계선이 된 38선이 생겨나면서, 한국은 UN의 신탁통치 아래, 미국의 후원으로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반면, 북쪽에 주둔한 소련 군대와 공산주의자들은 북한 주민들의 사상과 행동을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소비에트 체제를 강요하였다.” 미국 군정의 후원은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소련 군정은 사상과 행동을 억압하는 공산주의 체제 강요로 이어졌다는 보도이다.

미국 군정은 1948년 한국 정부의 탄생과 함께 끝이 났으며 1949년 6월 30일 미군의 마지막 파견대가 떠나갔다. 그러나 “38선 위쪽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은 북쪽의 한국인들을 집결시켜서 군대를 조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세 부류로 조직되었다. 첫째 대부분은 시베리아나 중국 북쪽에 살던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자들, 둘째 북한 공산주의 골수분자들, 셋째, 북한 여러 지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어린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북한군에 소련군이 “러시아 탱크와 대공 미사일 등 다양한 중․대형 화기를 공급하면서 다가올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2. 신생 대한민국, 500만 명의 새로 유입된 국민들을 포용하다

한편 “1948년에는 유엔위원회가 사천 년 역사상 처음 열린 총선을 감독했다. 그렇게 선출된 정부는 결코 ‘꼭두각시 정부’이거나 미국이 ‘세운’ 정부가 아니었다. 그 정부의 입법부와 전부 관리들은 선거에 참여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뽑혔다. 그 선거는 오래된 민주국가를 위한 모델이 될 정도로 정당하게 치러졌다.”

그런데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남한에 거의 500만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 중 “350만 명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테러를 견디지 못한 피난민들이었다.” 당시 “남한은 북한 화학공장과의 연결이 끊어진 가운데, 화학비료의 부족으로 식량부족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형편에서도 신생 대한민국은 이들 500만 명의 새로 유입된 국민들을 잘 흡수, 포괄했다. 그래서 6.25 남침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부 구호를 받는 사람은 10만 명도 채 남지 않았다.

류금주 목사

<청교도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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