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아버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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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태어나 한평생 멋지게 살고 싶었다. 옳은 것은 옳다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말하며 떳떳하게, 정의롭게, 사나이답게,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라 했던가! 하지만 나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더라!​

변변한 옷 한 벌 없어도, 번듯한 집 한 채 없어도 내 몸 같은 아내와 금쪽같은 자식을 위해 이 한 몸 던질 각오로 살아온 세월! 애당초 사치스런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구나!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고 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한 것은 누가 건네준 짐도 아니건만 바위보다 무거운, 무겁다 한들 내려놓을 수도 없는, 힘들다 한들 마다할 수도 없는 짐을 진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으니 목이 멜 수밖에! 용기를 잃은 것도 열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건만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아서 살아가는 일은 버겁고 무엇 하나 만만치 않아도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고 도리라는 말로 노릇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가슴으로 울 수밖에….

아버지가 되어본 사람은 안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해서도 울어서도 안 되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서 운다. 아무도 몰래 혼자서 운다. 하늘만 알고 아버지만 아는… ㅡ이 글은 여류시인 이채(본명: 정순희, 1961~ )의 산문 같은 한 편의 시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가 “아버지”일 것이다. “하나님” 이란 호칭보다 “아버지”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부를 자격이 없고 부족해도 받아주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상처도 싸매어 주실 것 같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에 있는 말을 해도 잘 들어주실 것만 같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떠올려 본다. 이 비유를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나는 이 비유의 타이틀을 “아버지의 눈물”이라고 붙이고 싶다. 이 비유는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물론 성경본문에는 “눈물”이라고 하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스토리에서 시종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은 아버지의 눈물이다. 아버지가 흘린 눈물은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의 눈물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자녀가 있어도 똑같지가 않고 달라도 너무도 다르다. “어디서 이런 게 나왔는지?”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집의 둘째 아들이 그랬다. 그는 요즘 말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란 말은 사실인즉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는 제멋대로의 존재”를 말함이다. 이 녀석은 정말로 몹쓸 녀석이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해달라고 했다.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짐을 쌌다는 것은 그의 가출이 계획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먼 나라로 갔다. 그 녀석에게는 가고자 하는 나라가 미국이든 중국이든 독일이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아버지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진리’가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옳은 것’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잔소리’가 듣기 싫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었다. 가진 재산을 허랑방탕 낭비해도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신바람이 났을 것인가! ‘잔소리’ 하는 아버지보다 귀에 ‘달콤한 소리’를 들려주는 친구들이 더 좋았다. 

이 아들에게는 더 이상 보호자가 없었다. 보호자가 필요한 아들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은 큰 슬픔이고 비극이었다. 아버지로서도 보호해 주어야 할 아들이 없어진 것은 큰 상심이었고 걱정이요, 절망이었다. 그토록 기고만장해서 집을 나갔던 아들이 노숙자와 같은 거지꼴로 등장하자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그를 반가이 맞는다. 아버지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아들의 더러운 얼굴에 입도 맞추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어루만졌을 것이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집나갔던 아들을 위해서 다시 눈물을 흘리신다. 그런데 이때의 아버지의 눈물은 슬픔과 상실의 눈물이 아니라,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자식은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눈물》의 의미와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는 철든 자녀가 되는 것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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