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고난과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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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9년 1월부터는 나 자신을 의심할 만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미시간에서의 고난이 우리를 이곳에 보내어 댈러스에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한 것 같았다. 1979년 3월에 12학년에 들어간 지희는 5월에 있을 TOEFL 시험 준비를 했다. 대학 입학의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수학이 이곳에서는 제일 쉬운 과목이 되었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다만 교회가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여서 문제였지만 즐거움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교회는 평화롭지 못했다. 교회가 분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못하면 교인들은 떠나간다. TV의 채널을 바꾸듯 딴 곳으로 옮겨간다. 오라는 교회가 많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은혜스럽다”거나 “오늘 설교 죽 쑤었다”라고 화를 내며 교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민 사회는 잘난 사람이 많다. 비록 설교를 잘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성경만 잘 풀어 이야기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한다. 목사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지금 삶에 맞게 성경을 재해석하라고 말한다. 또 말은 잘하는데 섬기는 삶의 본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런 불평이 쌓이면 교회는 수렁에 빠진다. 불평하는 사람이 지도자인 장로면 교회는 장로파와 목사파로 갈린다. 불평하는 사람이 평신도이면 그를 잠잠하게 해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 목사는 진땀을 빼야 한다. 교회가 갈라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평신도 지도자와 목사의 견해차 때문이다. 또는 평신도 사이의 견해차에 목사가 그 어느 한 편을 지지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댈러스 한인 장로교회가 분열된 것은 후자이다. 근본 이유는 교회 건물 구매 때문이었다. 교회를 새로 사서 옮기자는데는 아무 이견(異見)이 없었다. 모두가 미국 교회를 빌려서 쓰는 일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한국인이 쓰고 간 자리에서는 김치 냄새가 난다고 미국 교회에서는 항의해 왔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김치 안 먹고 고기 굽지 않으면 먹는 맛이 없었다. 또 한국 애들은 유난했다. 학교에 가면 미국 교사의 말은 잘 듣는데 교회만 오면 큰 소리로 떠들고 방방 뛰며 어디나 쓰레기를 버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를 빌려준 미국 교회 학생들은 큰 전시판에다 “교회를 깨끗이 합시다”라고 쓴 뒤 온갖 버려진 잡동사니 쓰레기를 주워 모아 놓고 한국인들이 보라고 교회 통로에 탁자를 놓고 전시하는 것이었다. 우리만의 교회를 하나 가져야 한다는 건 모든 교인의 염원이었다. 또한, 자금도 어느 정도 적립되어 있었다. 물망에 오른 교회는 매물로 내놓은 한인 중앙장로교회였다. 이 교회를 답사하고 온 건축위원장이 공동의회에서 이 교회의 입지 설명을 했다. 그러나 좀더 두고 물색해 보자는 이야기로 회의는 끝났다. 얼마 뒤에 갈랜드에 있는 미국 교회가 매물로 나왔는데 그곳은 대지도 넓고 또 우리가 산다면 교회가 미국 노회에 정식으로 가입하는 경우 10만 불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견은 대립했다. 한인 교회를 사자는 쪽과 갈랜드의 미국 교회를 사자는 두 쪽이었다. 목사는 갈랜드 교회 쪽이고 건축위원장은 한인 교회 편이었다. 건축위원장 편은 갈랜드 교회는 미국 노회에 정식 가입해야 혜택이 있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미국 장로교에 가입하는 것은 교회 재산 전체를 주고 미국 노회에 의존해서 살자는 것인데 한국 사람이 왜 그래야 하는가? 독립 교단이면 된다, 미국 교단에 들어가려 하는 것은 주체성이 없는 짓이다,이것은 목사의 사례가 부족하므로 보조를 받아 더 많은 사례금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한 편에서는 더 나은 교회를 사는 것이 앞날을 위해 좋지 않겠는가? 미국에 있는 교회가 미국 노회에 가입했다고 주체성이 없어질 만한 이유도 없다고 맞섰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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