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배움의 열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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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내 나이 26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시집에 살다가 분가를 했다. 남편은 29세에 장로님이 되었다. 육군사관학교 교회에서 생도 복음화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보람도 느꼈으나 26년이란 세월을 거의 여전도회장을 하면서 힘든 일이 많아 내가 하고 싶었던 꿈들을 내려 놓으려고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꿈을 조금씩 이루려고 노력을 했다.

고마운 것은 우리 아이들의 남다른 효심이었다. 나는 피아노 교습도 하며, 교회 봉사가 많아 아이들을 돌봐줄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부모를 도와주었다. 하나님 은혜라 생각한다.

큰아들이 공부를 더 하겠다고 1987년에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두 아이의 아빠가 자비로 유학 생활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며느리도 돈을 벌어야 했고, 어린 손녀들이 보고 싶어 1~2년에 한 번 정도는 장로님과 같이 큰아들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다가 오곤 했었다.

1994년도에 장로님과 같이 아이들을 보러 갔었다. 두 손녀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두 손녀는 학교에 다니면서 미국문화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을 느꼈다. 미국에서 생활하려면 먼저 영어, 운전, 그리고 컴퓨터는 기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장로님과 나는 영어도 안되지, 컴맹이지, 그나마 장로님은 차 운전이라도 하는데 나는 차 운전도 배우지 못했지, 손녀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나를 얕보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손녀가 어릴 적 바이올린을 배울 때는 내가 피아노 반주를 해 주면 좋아하고, ‘할머니가 피아노도 치네’ 하고 대단하게 보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지금은 기본적인 것을 하나도 할 수 없어 무능한 할머니가 된 것만 같았다.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먼저 컴퓨터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둘째 손녀에게 1시간에 5불 줄테니 가르쳐 달라고 했다. 매일 하루에 성경 말씀 한 장씩 치며 컴퓨터 타자 연습을 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부평에서 살면서 여성회관에서 미국인 선생님에게 회화를 배웠다. 물론 열심히 하는 만큼 암기가 되지 않아 힘들었으나 꾸준히 했었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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