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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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자를 사랑하던 어린이 ④

한국 기독교 한 마리 아사셀 양

황씨 집안 독실한 신앙가족

1923년 기미년에 출생

세 살 때 홍역으로 병원서 포기

소파는 30세에 죽었으며, 예수는 33세에 죽으셨다. 황광은 목사는 47세에 가시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사는가에 있지 않다. 오직 어떻게 사는가에 있는 것이다.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살아서 말한다.” 황광은 목사님은 이처럼 사시고 이처럼 가시었다. 그리고 시간을 넘어 우리와 길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가 남긴 서재에는 주인 없는 패스포트와 <한국 아동 복지회> <한국 기독교 문화 센터>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 계획> 등의 생전의 메모가 말없이 놓여 있었다.

황광은 목사! 그는 한국 기독교의 한 마리 아사셀 양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증인인 것이다. 여기에 그를 못내 추모하는 우리의 사죄와 아픔이 있다.

죽었다 살아난 아이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압록강을 끼고 발달된 도시 신의주에서 남쪽으로 오십 리 가량 내려오면 양시(楊市)라는 역이 나타난다. 인구 2만이 조금 넘는 조그만 거리지만, 남시(南市)·선천(宣川)·정주(庭州)를 거쳐 평양으로 내려가는 경의선이 있고, 신의주에서 용암포(龍岩浦)를 거쳐 다사도(多獅島)로 빠지는 다사도선의 갈림길이라 교통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황광은은 양시에서 1923년 2월 25일에 황도성(黃道成)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행정 구역상의 정확한 명칭은 평안북도(平安北道)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시북동(市北洞) 25번지.

본관(本貫)이 창원(昌原)인 황 씨 집안은 일찍부터 개화의 물결을 받아들였다. 할아버지인 황효청(黃孝淸)은 비록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으나, 예수를 믿어 양시교회에서 영수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 도성 씨는 집사였고, 어머니 김도순(金道順) 여사 역시 집사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워낙 독실한 신앙 가족이라 아버지 도성 집사는 광은이 열여섯 살 되던 1938년에 용암포 중앙교회에서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고, 어머니 김도순 집사 역시 같은 날 같은 교회에서 권사 취임식을 가졌다.

광은이 태어나던 1923년이라면 한국 민족의 함성인 기미년(己未年)의 만세소리가 온 세계를 뒤흔들고 난 지 네 해 뒤이다. 일본 무단 통치(武斷統治) 밑에 있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질식할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런 때에 광은은 태어났다. 그 가족 상황에 관해 맏형인 황태은(黃泰恩)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되던 개화 초기에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봉하게 된 어지신 분이었다.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해 할아버지도 독자였고, 아버님은 3대 독자였다. 아버지 대에 와서 하나님의 한없이 크신 축복으로 아들만 내리 8형제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자라는 과정에서 그 절반이 죽고 4형제가 남아 장성하게 되었다.

맏이로 태어난 나는 귀여운 동생들이 한창 재롱을 떨 나이가 되면 죽어가곤 하는 가슴 아픈 경험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그래서 자라나는 동생들을 늘 조바심을 갖고 대해 왔다. 그러나 우리 4형제만은 모두 탈없이 장성해 가정을 이루고, 자손을 두었으며, 교회와 사회에 떳떳한 일꾼들로 삶을 영위하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광은이 세 살 때 홍역을 앓게 되었다. 요새는 홍역이라면 감기 정도로도 생각지 않게 되었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고 문명의 혜택도 별로 입지 못했던 그 당시에는 거의 반수가 생명을 잃곤 했다.

더욱이 광은이 위로 내리 두 아들을 잃은 터라 집안에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1주가 지나고 열흘이 되었지만 병이 낫지를 않았다. 의식을 잃은 채 여린 숨만 힘들게 쌕쌕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병원에 데려다가 사흘 동안 호흡기를 사용해 겨우 연명시켰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다. 더욱이 의사까지도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내렸다.

할아버지인 황효청 영수는 귀여운 손자가 또 한 명 죽는다는데 대해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지금 한창 재롱을 떠는 귀여운 것이 죽다니… 그는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고 한 손자를 등에 업고, 이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황 영수가 의지할 데는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는 뒤주 위에 쌓아올려 놓은 이불에 이마를 대고, 손자를 업고 선 채 기도드렸다.

“하나님, 이 손자가 거의 죽게 되었사오니 살려 주시옵소서. 만약 살려 주신다면 하나님께 이 손자를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광은은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기도를 들으며 끝내 숨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한숨과 함께 광은을 윗목에 누이고 이불을 씌워 놓았다.

그때 열 세 살이었던 형 태은 소년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이제 또 세 번째로 동생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다니…

그는 이웃사람들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죽은 사람 인중(人中: 코와 입 사이의 오목하게 파인 곳)을 비비면 살아날 수 있다.”

그래서 동생의 인증을 계속 비비며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기도라야 “하나님, 내 동생을 살려 주시오” 하는 한 마디 뿐이었다. 형의 머리에는 교회에서 들은 성경 구절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했는데… 내 동생이 살아난다는 것을 나는 꼭 믿는다.) 

그러나 날이 훤히 밝아오는데도 동생 광은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살아나라 광은아! 어서 살아나라 광은아!)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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