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약자에게 관심 쏟는 목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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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연속극의 내용은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연이나 조조연, 단역에게는 서운하겠지만 사실입니다. 공동주연으로 캐스팅된 배우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첫 회에서 먼저 이름이 나온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역사도 변두리, 주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입학, 졸업도 일등에 관한 이야기요, 모든 경기대회,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먼저 찾아갈 힘있는 관공서, 기관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이 어디입니까? 베데스다 못입니다. 베데스다 못은 12개 성문 가운데 북쪽에 있는 폭이 50m, 길이가 95m가량의 직사각형 못입니다. 그 못에는 많은 병자, 시각장애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38년 된 병자가 병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체적 약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베데스다 못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마자 베데스다 못을 먼저 찾아가신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약자에게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강자가 있지만, 약자도 많습니다. 육체적인 이상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입원해 있는 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신체가 허약한 육체적인 약자입니다. 정신적으로 허약한 정신적인 약자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약자도 많습니다. 교회 등록한지는 오래 되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어 오락가락하는 교인들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거쳐오면서 더 그렇습니다. 신앙적인 약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적인 강자는 참 좋습니다. 고맙고 든든합니다. 목회에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교회 안팎으로 영향력도 큽니다. 그럴지라도 목회자의 관심은 약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평등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단 한 명의 낙오자가 있어서도 안 되고, 단 한 명의 특별한 대접을 받는 특권자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교인을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강자 앞에서 약하고, 강자 앞에서는 고개도 잘 숙이면서, 늙고 병들고 힘없고 돈 없는 약자 앞에서 강하고 도도한 것은, 비열한 못된 짓입니다. 맘에 든 교인끼리만 뚤뚤 뭉쳐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래야 하겠습니까? 행여라도 교회 안에서 교인을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태강즉절(太剛則折)이란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 쉽다는 뜻입니다. 나무도 사람도 마냥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기 쉬우므로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강자만 찾는 세상에서 목회자는 약자에게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첫사랑, 첫 열정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전도문을 여는 방법입니다. 약자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덕을 쌓는 방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약자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며 잘 나갈 때 오르막길에서는 하나님이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심장마비로 쓰러져 내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비로소 내 눈에 하나님이 보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자에게 관심을 쏟아야 주님이 보입니다. 약자에게 관심을 쏟아야 약자가 보이고, 사명이 보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초심입니다.

김병훈 목사

<동해청운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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