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아버지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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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한의사가 왕진 후 바로 돌아가셔서 유언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유언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내게 들려주신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리운 모습으로 한마디 하신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버지는 끝내 나에게 귀국하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1980년 6월 8일 나는 그때 미국에서 학위 과정에 있을 때였다. 나는 두 주후 우연히 문안 전화를 드렸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야 미국에서 송 목사님 집례로 내가 사는 집에서 추도예배를 드리며 울음을 삼켰다. 

나는 크는 동안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첫째는 내가 초등학생 때 학교 귀갓길에 홍수에 덮인 길을 걷다가 익사해서 죽을 뻔했는데 길가에 자란 나무에 걸려 있다가 살아난 일이다. 아버님은 함평 대화국민학교(함평 초등학교)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1941년 학교면 월송리(鶴橋面 月松里, 1973년부터 대동면에 편입됨)에 새로 시작하는 작은 초등학교를 개척하여 운영하고 계셨다. 내가 2학년 때 그 학교는 1학년으로 시작하여 점차 2, 3학년으로 커가는 학교였다. 따라서 나는 그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십리 길을 걸어 2학년으로 함평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폭우가 쏟아져 귀갓길이 물로 덮인 것이다. 물세례라면 너무 어마어마한 세례를 나는 받은 것이다. 그 속에 빠져 나는 죽었는데 나무에 걸려 떠 있는 모자 때문에 학교 소사(小使;사환)가 그걸 보고 날 구원해 주었다. 

두 번째는 내가 중학생일 때 전신주에 올라가 변압기를 잘못 건드려 감전되어 실신해 땅으로 떨어진 일이었다. 그때는 자주 정전이 될 때였다. 전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전신주에 놓인 변압기에서 퓨즈가 끊기거나 진동으로 접촉이 끊겨 정전될 때가 많았다. 나는 겁 없이 그곳에 올라가 잘 고치곤 했다. 그곳 전압은 2,200V였다. 그런데 그때는 비가 온 날이었는데 정전이 되어 고무장갑도 없는 때 그냥 올라가 만지다가 감전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아마 아버지는 나를 저승 문 앞에서 두 번 건진 아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불 세례치고는 너무 엄청난 것으로 나는 그때 또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그래선지 아버지는 내가 특별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셨는지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 

성경에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있다. 아마 아버지가 “너는 이 가정을 이끌 장자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내가 아니고 아버지가 만든 꼭두각시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후회하면서. 아버지는 시골 교장으로 학교의 정원을 만들며 우물가에 수양버들을 심으셨다. 나는 그분이 학교 동산을 조경할 때 나무들을 전정하는 것을 보아서 수양버들 가지를 전정 가위로 잘라 버렸다. 많이 화가 나셨을 텐데 그때도 꾸중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지금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조건 없이 사랑하는 내 아버지를 연상한다. 그런 아버지가 병상에서 “내가 힘들다. 제발 학위를 빨리 마치고 돌아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병원을 가지 못하고 한의사만 의지하던 아버지가 한 번은 진료를 받으러 갔더니 새파랗게 젊은 의사가 “술 끊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귀갓길에 못된 의사라고 했더니 “후레자식이라 그러지”라고 했으나 당장 다음날부터 술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연명하여 귀국하는 아들을 보고 싶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을 유언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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