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36) 알브레히트 뒤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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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유학 간 최초의 북유럽 화가

휼륭한 화가로 개인 창조 작품 다수 남김

1492년 고향에 와서 판화가의 딸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했고 공방을 차려서 성공했다. 이들에게는 평생 자녀가 없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탈리아에 1년여 머물면서 많은 배움과 경험을 쌓았다. 뒤러는 이탈리아로 유학 간 최초의 북유럽 화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볼로냐와 베네치아에서 화풍을 배웠고, 시골을 돌며 스케치했다. 뒤러는 이탈리아 유학을 두 차례 갔었다.

뒤러는 천재 예술가였다. 참된 미술가는 인문주의적 교양인이어야 한다. 주문받은 초상화, 제단화를 그렸다. 특히 목판화와 동판화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공방을 열기 전부터 인정받는 장인이었는데, 특히 1498년에 간행된 목판화 <요한 계시록>으로 독일 전역에서 천재 판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훌륭한 화가는 독창적이어야 하며 오래 살아남으려면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하게 살지 않고 직접 경험하려고 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여행도 많이 했고 여러 사물을 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상상력과 명상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1512년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뒤러는 그의 초상화와 황제의 책에 들어갈 삽화, 기도서에 들어갈 소묘들을 그렸다. 이때 큰 사업으로 황제의 목판화 <개선문>은 192개의 판목으로 만들어진 미술사상 가장 큰 목판화였으며, <개선행진>은 137개의 판목으로 구성됐으며, 전체 길이 55미터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또 그는 막시밀리안 1세의 무덤 조성 사업을 지휘하였다. 뉘른베르크 시청사 공사에 참여했고 조각과 건축에도 힘을 썼다. 그는 궁정 화가 활동과 개인적인 창조 상을 발휘한 작품들을 남겼다.

151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죽고, 이듬해 뉘른베르크에 역병이 돌자 그는 아내와 함께 네덜란드로 갔다. 1년 동안 많은 소묘와 회화를 그리며, 그뤼네발트 등 네덜란드 화가들과 사귀었다.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후 초상화, 동판화, 목판화를 제작했으며, 화가로서 가장 뛰어난 기량의 <네 사도>를 남겼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것이 농민 운동과 결합되어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뒤러는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마르틴 루터를 만났다. 뒤러는 그 뒤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뒤러는 루터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말년에 뒤러는 미술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1525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작품을 바탕으로 원근법의 책을 냈고, 2년 후 <측정술 지침서>, <인체비례론>, <요새론> 등의 저술에는 예술적 상상력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듬는 인문주의가 내포되었다. <측정술 지침서> 서문에는 “오늘날까지 독일의 젊은 화가들은 작업 경험으로만 제작하는데 이는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독일의 작가들은 측정에 관한 과학을 전혀 모르고 있다”라고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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