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노년에 가까워진 여고 동창생 <1>

Google+ LinkedIn Katalk +

나의 학창시절 중 가장 행복한 추억을 남긴 것 같다. 1학년을 마치고 나는 서울 문리과대학 부설 중교 생물과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헤어짐이 슬펐으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친구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학업을 마친 후에도 동창회에는 한동안 나가질 못했다. 시집살이 하며 모교 중학교 교사도 했고 분가해서도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교회봉사,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 그리고 집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느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후에야 여유가 생겨서 옛 친구들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에 약 20년 만에 동창회에 나갔었다. 친구들이 많이 변한 모습을 보며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바쁘다고 소중한 친구들의 만남을 놓치고 살았던 삶이 후회스럽게 생각도 되었다.

그때부터 시간을 내서 가끔 모임에 참석도 하고 내가 거주하고 있는 육군사관학교 관사로 초대도 했었다. 남편이 예편한 후에도 가끔 집으로 초대를 했었다.

어느 날! 친구 기숙이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해서 동창생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갔었다. 집은 공기좋은 곳이고 아파트였다. 응접실에 들어서니 노래가 들리는데 음향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오디오 시스템이 잘 돼 있는 것을 보며 ‘야! 너무 좋다’는 말을 하자 곁에 섰던 친구가 ‘기숙이 남편이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기숙이가 이대에서 성악을 전공해서 남편이 다 설치해 주었다고 하더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친구 기숙이가 이대 음대 성악과 나온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피아노 공부도 하고 피아노를 2대나 놓고 교습을 했으나 그 당시에는 군인 대우가 좋지 않았고 육사교회 장로는 남편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독 생도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교회 봉사는 물론, 주말이면 집이 멀어 외출하지 못하는 생도들을 위해 우리 집을 개방하고 음식을 나누어야 했고, 장로님과 4남매의 뒷바라지 하느라 나 자신을 위해서는 오디오 시스템을 갖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친구 기숙이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동창들과 즐거운 만남을 갖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동창 모임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큰아들 내외 초청으로 영주권 받고 미국으로 한국으로 오며 가며 하다가 큰딸이 미국에서 지휘공부를 하게 되어 딸 가족과 함께 미국에 아예 정착하게 된 것이다.

손주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면서도, 나이가 들어 오래 마음을 담고 살던 고향을 떠나 이민 생활에 적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큰아들 가족과 큰딸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으나 결국 10년 전에 어렵게 받은 영주권을 반납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립던 둘째 아들 가족과 막내딸 가족이 있고 내가 살던 고국이 너무도 좋고 행복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모이는 동창회, 춘천에서 모이는 동창회에 참석하면서 친구들과 옛 학창시절처럼 이름도 불러가며 수다도 떨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