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목단상] 순교자 조희렴(曺喜炎) 목사와 경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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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희렴은 유년시절 한학을 공부해 20세 나이에 캐나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서울에 H.G.Undewood설립 경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1911년 6회 졸업생)하면서 맥클린 선교사의 도움으로 1914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캐나다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고  캐나다 낙스 칼리지에서 문학사 학위와 토론토 대학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위하여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시카고 한인유학생회 회장으로 유학생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때 그를 유학시켰던 캐나다 선교부의 요청으로 박사학위 수업을 중단하고 1924년 귀국 원산 마르다 월슨 신학교 신학부장으로 교수를 하면서, 함흥 YMCA 총무직을 겸직, 한국 농촌을 사랑한 그는 농촌계몽과 사회운동, 나아가 기독교강연을 위해 북한 전 지역은 물론 만주 북간도지방까지 순방했다. 이런 그의 애국지심은 일경들의 미움의 표적이 되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게 되었고 일경에 의해서 여러 번 연행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원산 부시장에 추대되었고 그러나 이내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할 수 없었던 그는 사임하고 원산 남부교회를 설립해 목회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밀사가 원산남부교회 사택을 은밀히 찾아와 “조목사님 월남하시지요. 각하께서 친히 목사님을 모셔 오라는 분부이십니다.” “뜻은 고맙습니다만 목사에게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 양들을 버리고 어떻게 목사가 도망을 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도 죽음이 지척에 이르렀는데—”.  “아닙니다. 저는 양들과 함께 생사를 함께 하겠습니다” 하고 일언지하에 월남을 거절했다. 무엇보다 그가 사랑하는 양들때문이었다. 목숨도 귀하지만 그 목숨보다 귀한 것이 주님이 그에게 맡겨준 양들이었던 것이다. 

공산당은 조희렴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조희렴은 공산당에게 전혀 협조를 안할뿐 아니라 공산당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25사변이 터지고 10월들어 UN군의 진격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공산군은 공산군에 협조하지 않은 교회지도자들과 지식인을 일거에 숙청해 버렸다. 원산남부교회 조희렴 목사도 1950년 7월 6일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돼 투옥돼 혹독한 고문 끝에 국군의 선발부대가 원산에 입성하던 1950년 10월 9일 새벽, 원산 형무소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경신학교는 2015년 연세대학 대강당에서 개최된 학생 내빈 등 3000여  명이 회집한 중에 개교기념130년 기념식에서 순교자 고 조희렴 목사에게 자랑스런 경신인상을 수여했다. 

(계속)

김종희 목사

• 경신 중ㆍ고 전 교목실장 

• 전 서울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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