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유비와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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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권자는 인재를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명장(名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고 하지만 ‘종 잘 두어야 주인 노릇한다’는 말도 역시 명언이다. 상하 모두 잘 만나야 한다. 국가 경영은 팀 리더십(team leadership)이다. 반드시 협치(協治)해야 한다. 훌륭한 야당은 통치자에게 복이다. 쓴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지도자의 인품이다. ‘良藥苦口利於病/忠言逆耳利於行’(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건강에 유익하고, 비판적인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함에 유익하다) 때로는 자신을 버려야 소중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 ‘人事’가 ‘萬事’다. 

“헛된 명성 문필의 재주를 어디에 쓰리요(虛名文墨才何用). 칼과 거문고는 병들어도 멀리하지 말지어다(劍匣琴弱病不疎). 영웅의 공적은 한순간의 결정이니(功業英雄當磊落) 공명도 당일에 초가집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孔明當日起茅廬)”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기 위해 초가집까지 세번이나 찾아간 고사를 든 것이다. 수경 선생 사마휘가 유비에게 “당신에겐 관우, 장비와 같은 맹장과 미축, 손건 같은 행정관료는 있는데 천재 책사(謨士)가 없다”고 하며 와룡과 봉추가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하자, 유비는 와룡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제갈량이다. 사마휘보다 먼저 와룡을 알려준 사람은 서서(徐庶)였다. 그는 제갈량의 기숙사 친구였다. 유비가 서서에게 제갈량을 불러와 달라고 부탁하자 유비가 직접 가야 올 거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유비는 직접 제갈량을 세번이나 찾아갔다. 세 번째 방문 때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다는 말에 잠이 깰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재야의 선비들이 <삼국지 연의>를 가장 좋아하고 감동하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재야의 선비나 인재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지도자와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한탄은 불만이 되기 쉽다. 누군가 나의 재능과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된다. 대통령과 국가 지도자들은 국민 중에 분야별 인재풀을 정확히 파악해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일이 애국하는 일이 될 것이다. 훗날 제갈량이 북벌을 시도하면서 황제 유선(유비의 아들)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를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세번 찾아간 것은 못 만나서 간 것이 아니라 세번이나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유비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천하삼분지계’를 논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두사람의 대화는 면접이자 탐색전에 가까웠다. 틀에 박힌 관료사회로의 진입을 거부하던 제갈량은 자신의 주군이 도전과 변화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대의를 수용할만한 그릇임을 파악하고 동참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유비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 서주를 통치하며 유비는 인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자기 조직을 살려줄 천재 경영자와 탁월한 군사 전략가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제갈량을 발견한 것이다. 유비의 라이벌인 조조와 손권은 확고한 영토와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며 압축 성장을 해야 하는 유비로서는 비범한 인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유비의 지혜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그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였다(겸손과 존중/partnership과 servant leadership). 1억 원짜리 다이아몬드를 100만 원에 팔려고 하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10억 원에 팔겠다고 하면 꼭 필요한 사람만이 살 것이다. 

유비에겐 제갈량이 10억짜리 보배였다. 유비는 제갈량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고, 의심한 적도 없다. 평생 신뢰와 존경을 표했다. 제갈량은 엽관을 추구하지 않고 평생 밭만 갈았다. 유비의 성공은 곧 제갈량의 성공이었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제갈량은 누구인가.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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