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40) 알브레히트 뒤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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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도’ 작품 통해 화가로서 최고 수준 도달

훌륭한 학자 ‘성 제롬’을 그려 멘토로 입증해

피곤한 듯 웅크리고 있는 개의 모습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아기 천사, 눈을 부릅뜨고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여자, 어지러이 널려 있는 도구들, 골똘하게 탐구하다 지친 모습,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 뒤러가 이 작품을 만든 시기인 1514년은 유럽에 르네상스 문화와 루터의 종교 개혁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이러한 이해가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멜랑콜리아 1>은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1513),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1514)와 함께 1513년과 1514년 사이에 만든 뒤러의 3대 동판화이다. 이 동판화는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24.2-24.8cm와 19.1cm로 크기가 거의 같다. 뒤러는 이 3점의 뛰어난 동판화에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한껏 발휘했다. 세련된 형태 및 풍부한 구상과 분위기가 고전적으로 완벽한 전체 작품에 스며 있다. 뒤러의 동판화는 정교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는 ‘척도의 예술 없이 훌륭한 장인이 될 수 없고 되지도 못한다. 나는 모든 젊은 예술 애호가들이 기하학에서 시작하게 할 작정이다’라고 했다.  

뒤러는 1515년 경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520년 7월 뒤러는 아내와 함께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1521년 7월쯤 뒤러 부부는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지만 뒤러의 건강은 이미 나빠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몇몇 유명인사의 초상화를 그렸고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을 동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했으나 이론적 과학적 저술과 삽화 그리기로 여생을 바쳤다. 그의 가장 뛰어난 회화 작품 중 <네 사도>는 1526년에 그렸다. 이 작품을 통해 뒤러는 화가로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솜씨에 언제나 만족했으나 단순하면서도 표현이 풍부하고 폭넓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은 강했다.  

뒤러는 <성 제롬>을 그렸다. 뒤러가 성 제롬을 자신의 멘토(Mentor)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멘토’라는 말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인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며, 아들 텔레마코스를 보살펴 달라고 한 친구 ‘멘토’에게 맡겼는데,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그 후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뒤러는 이탈리아 미술을 경험하려고 험한 알프스 산을 넘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를 여행했다. 마치 제롬이 광야에서 행한 고행과 연구 및 기도생활을 연상하게 했다. 제롬은 훌륭한 학자였다. 가톨릭에서 제롬은 사후에 추기경으로 추대된 교회박사 네 사람 중 한사람이다. 제롬은 성경을 라틴어 불가타 판을 번역했다. 성경 번역을 위한 그의 생애는 훌륭했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외경을 번역하라는 명령을 받아 번역했으나 제롬은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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