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짧고 굵게 산 한평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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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어코 하워드패인 대학에 와서 1984년 9월부터 근무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덴턴의 Singing Oak 아파트에 애들과 함께 살고, 나는 하워드패인 대학 기숙사에서 홀로 살며 주말 부부로 덴턴의 아파트로 출퇴근했다. 물론 주일에는 장로로 시무하고 있는 댈러스 한인장로교회에 출석했다. 1984년 11월 4일이었다. 내가 교회에 가까운 갈랜드 커뮤니티 병원에 도착한 것은, 6시가 넘어서였다. 목사가 입원했기 때문이었다. 입원실에 들어서자 벌써 많은 문병객이 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때 섬뜩했던 것은 병실을 꽉 메운 노란색 그리고 흰색의 국화 화환이었다. 오전 중 장로, 안수집사 임직식 때 썼던 화환이 다 이곳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꼭 장례식장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병실에 왜 이렇게 많은 꽃을 장례식장처럼 갖다 놓았을까? 

목사는 피로해 보인 모습이었지만 임직 식을 집례할 때 휘청거리던 때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 주며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모는 최근 목사가 너무 무리했다고 말했다. 월초부터 소화가 잘 안 되어 유동식만 들었는데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있었던 캔톤 오하이오의 부흥사경회는 모처럼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무리하고 갔던 집회에서 10회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진통제를 맞아가며 진행했다 한다. 그는 귀가하자 28일 저녁, 사택에 장로들을 모아 놓고 10월 정기 당회를 2시간 반 동안 진행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오스틴에서 열린 3박 4일의 평신도를 위한 지도자 수련회에 참석했다. 거기서는 계단을 제대로 걸어 내려오지 못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먼 여행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서둘러 무리해야 했는가? 그리고 임직식 날도 진통제를 맞고 식을 집례했다고 말했다. 그의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 9:16)’라고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안타까웠다. 물론 그는 완전히 자기를 주께 맡기고 자신을 주의 도구로만 써 달라고 서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 그렇게 무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내셨다. 다만 그가 이를 무시하고 죽도록 충성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평소 ‘짧고 굵게 살겠다’고 말하며 주어진 주의 일은 사양하지 않았다 한다. 따라서 그의 가족들도 그가 하는 일을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종합해서 그가 아예 죽으려고 기를 쓴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그는 몰랐는가? 그는 하나님의 도구임과 동시에 여러 성도 앞에 삶의 모범을 보이며 살아야 할 주의 사도다. 만일 생명이라도 위급하게 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또 교회는 철석같이 의지하고 있던 지도자 한 사람을 잃게 된다. 교회에서 지도자를 잃는다는 게 얼마나 큰 손실인가?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평소 목사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신학교에서 목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은 다 대학 기숙사에 수용하라. 전교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라. 양심제도를 두어 아무리 성적이 좋더라도 목사의 자질을 갖지 못한 사람은 퇴교시켜라. 나라를 지키는 육사생이 퇴교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영혼을 마귀의 장난에서 지키며 건질 목사도 퇴교제도가 있어야 한다. 신학교를 운영할 재원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 돈은 신령한 목사를 원하는 전국 교회가 부담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내 꿈일 뿐이었다. 각 교단은 교단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목사 양산에 앞장서서 교단 세력을 확보하는 경쟁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렇게 양산된 목사 속에서 이렇게 귀한 목사를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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