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자칭 국보 양주동 박사의 일화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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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1903-1977) 박사는 박학다식한 교수로 자칭 국보라 했다. 일제시대 절충주의 문학인으로 <조선의 맥박>이라는 시집도 발간했다. 문필활동은 1922년부터 10여년 했다. 친일문학활동은 없는 민족주의자였다. 1935년 이후 꾸준히 학자의 길을 걸었다. 일본 유학 영문학자였으나 가정에서 배운 한문실력이 뛰어나 신라향가연구에 몰두했다. 신라향가연구로 경성제대에서 문학박사가 된 고쿠라(小倉進平) 일본인 교수의 향가논문 맹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때 양주동 교수는 24세 젊은 나이로 평양 숭실대 교수로 있었다. 고쿠라 일본인 교수를 앞지른 양주동 교수의 향가연구는 1943년 ‘조선고가연구’ 저서로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우리나라 국어국문학 5대저서로 최현배 박사의 ‘우리말본’, ‘한글갈’, 김윤경 박사의 ‘조선문자급 어학사’,양주동 교수의 ‘조선고가연구’, 조윤제 교수의 ‘조선시가사강’ 등이 출판되어 한국의 국어국문학정신을 살렸다. 양주동 박사는 신라향가연구 고려가요연구 등으로 큰 학문업적을 남겼다. 양 박사는 ‘문주반생기’, ‘지성과 광장’ 등의 수필집을 내면서 광복후 문필활동도 했다. 서울대 출강 중에 명예문학박사를 서울대서 받으라 했으나 서울대에 양주동 교수 논문 심사할 교수가 없다고 거절하고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술 즐기는 양 교수에게 연세대가 주는 명예박사학위는 순전히 양주동 교수 실력을 보고 수여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허락한 것이라 했다. 순우리말 한글로 된 최현배 박사의 명예박사 드리는 글과 백낙준 박사가 박사학위를 수여하며 양 교수 손을 잡고 “양 교수 술을 삼가시오” 하시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1957년도에 박사학위 받은 이듬해부터 양 교수는 5년간 연세대에서 봉직했다. 국문과 3학년 때 고려가요를 배우던 나는 문과대학 학생회지 ‘문우’에 ‘고려가요와 국민사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읽어보신 양 교수는 잘 썼다고 강의실 여러 학생 앞에서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학자가 되려면 첫째 소원 둘째 재주 셋째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서울대 출강 중 이어령 학생은 송강 정철에 대해 시험 문제를 냈더니 영국 T.S. 엘리엇과 비교해 시험지 앞뒤에 논리적으로 아주 잘 써서 100점 주려다가 교만해질까봐 99점을 주었다고 했다. 졸업 후 이어령은 실력있는 평론가로 이화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까지 역임한 한국의 인물이 되었다. 아깝게 지난 여름에 별세했다. 

강의실에서 자유당 독재정권을 가끔 비판하던 양 교수가 4.19거리 정의 자유의 혁명을 마치고 강의실로 돌아온 학생들 앞에서 “학생 여러분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하시며 손수건으로 눈물도 닦았다. 이기붕 일파의 인의 장막에 가려 독재 정치를 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양주동 교수는 싫었던 것이다. 

그 독재 자유당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살려낸 학생들이 장하게 생각된 것이다. 학생회에서 먼지를 일으키는 교수의 자가용 백양로 출입은 학교당국에 건의하자는 학생들 결의를 알고 자기는 당뇨병 때문에 지프차를 타고 여러 대학에 출강하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런 얼마 후 양 교수도 학교버스로 출퇴근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중 하숙집에서 경상도 천재 노산 이은상과 황해도 천재 양주동의 영어단어 외우기 시합은 2전 1승1패 무승부로 오늘에 이른다고 했다. 정년을 마친 양 교수는 동아방송 유쾌한 응접실에서 전영우 아나운서 사회로 우리 강의실 강의를 다시 다 말씀했다. 이 밖에도 숨은 일화는 많다. 양주동 박사가 그립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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