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짧고 굵게 산 한평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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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목사의 병세는 점차 나빠져 11월 10일에는 좀더 큰 베일러 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피로에서 오는 간암이었고 너무 늦게 병원에 오게 된 것이었다. 얼마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으나 18일부터는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 회복이 어렵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댈러스 교인들은 목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치유해 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이런 확신으로 기도하고, 또 한 사람이 연이어 기도하자 온 교회는 합심해 하나님께 매달려 목사의 완쾌를 빌게 되었다. 순번을 정해 철야기도팀을 짜고 목사가 회복하기까지 교인 중 한 사람은 잠을 자지 않고 교회에서 기도하기로 한 것이다. 장로들은 하루씩 교대로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내가 그를 지키기로 한 날은 22일이었다. 대학의 강의 시간을 옮기고 병실로 갔었다. 사모와 황 전도사가 간호하고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고 약간의 주스와 미음을 들었다고 기뻐했다. 아! 기도는 응답될 것인가? 그는 오래도록 앉아 내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교회가 이제는 든든히 서서 나가게 되었다고 빨리 목사가 나아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만일 이 병을 이기지 못하면 하나님의 치유를 믿고 철야기도를 한 교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절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도사는 요즘 목사가 강한 삶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이는 좋은 징조라고 말했다. 황 전도사는 기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는 약간 걸어보겠느냐고 권했다. 송 목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좀 걸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웠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는 갑자기 강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숨이 막힌 사람처럼 발을 쭉쭉 뻗으며 몸부림을 했다. 나는 얼결에 발목을 잡으며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바로 응급실로 옮긴 후 전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24일 아침 8시 39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일심으로 기도하던 교인들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인들과 정을 떼지 못하고 너무 짧은 시일에 떠나간 것이었다. 인디언의 속담에 ‘훌륭한 사람은 태어날 때는 자기는 울고 옆에 사람들은 웃는데 죽을 때에는 자기는 웃고 남은 울게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마 목사는 짧고 굵게 살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에 주 앞에 못다 한 일들을 집중적으로 처리하고 스스로는 만족스러워 웃으며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를 잊지 못해 애통하며 울며 보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같이 살면서 삶의 본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7년의 청춘을 이국땅에 묻힌 송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은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그를 생각하며 흐느꼈다. 그가 그렇게 쉽게 떠날 것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얀 봉투 한 장을 남겼는데 그것은 캔톤 오하이오에서 받은 강사 사례비였다. 봉투도 뜯기지 않은 채 있었다. 이것은 종잣돈이 되었다. 그 뒤 일주년 추모예배 때에 교인들은 「수석 기념 장학금」을 만들어 프린스턴 신학교에 보내기 위해 5만 불의 헌금을 약정했다. 

나는 평생 처음 장례위원장이 되어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남부지역협회장(葬)」으로 김창환 목사 사회, 총회 최창욱 목사의 설교, 김인식 목사의 기도로 장례를 돕고 그를 교회 가까운 장지에 안장했다. 나는 그에게 주는 나의 마지막 추도사를 준비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내게 다가올 죽음을 생각했다. 그는 목사로서 많은 교인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그가 죽을 때 하나님을 만날 것은 더 여러 번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교인들을 더 단합시켰고 미지근한 믿음을 불붙게 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예정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은 사는 것보다 더 어렵게 선택된 것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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