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惡은 惡으로 해결할 수 없다

Google+ LinkedIn Katalk +

빛의 총량을 늘리려면 어둠을 빛으로 바꾸어야 한다. 열을 열로 다스리는 것(以熱治熱)은 가능하지만 악을 악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성경도 말한다.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라”(살전 5:15).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살아라.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Servant)으로 살아라”(벧전 2:16). “형제자매 여러분,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중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는 난세였다.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중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를 ‘기나긴 계엄령의 시대’라고 했을 정도다. 전쟁은 비상시국이고 법은 가혹했으며 형벌은 점점 더 엄격해졌다. 사회는 실용주의 쪽으로 변해갔고, 국가는 점점 더 즉효가 있는 강한 법과 가혹한 형벌 쪽으로 변해갔으며 그 과정에서 학살, 약탈, 포로, 살해, 다른 민족의 탄압 등이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악으로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가 통하게 되었다. <삼국지>의 ‘위서’에 따르면 조조는 ‘혼란한 상황을 해결하려면 통치 수단으로 교화보다 강력한 형법 집행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강경론자). 이런 의견에 반대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위나라 정치가였던 고유(高柔)였다. 고유는 한때 원소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에게 귀순한 뒤 간현의 수령으로 있었다. 그는 청렴결백한 공직자로 명성이 높았기에 그가 수령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부정부패를 저질러 온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려고 작정했다. 이에 대해 고유가 말했다. “그들은 내 휘하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따라서 내 밑에서 부정을 저지른 일도 없다. 그러니 전원 다 복직시켜라” 이 말을 듣고 돌아온 관리들은 모두 반성하고 심기일전해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 고유는 빛의 총량을 늘리려면 그늘(暗)을 제거할게 아니라 그늘을 빛(光)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엔 군대에서도 도망자가 많았는데 당시 법률에 따르면 탈영병의 처자식은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영병이 줄지 않자 조조는 처벌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 그러자 고유가 말했다. “군인이 도망가는 것은 한탄할 일이지만 그들도 도망친 뒤에는 후회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처자식을 관대하게 처리하면 우리에게 세 가지의 이득이 있을 것이다. 첫째, 적(敵)이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고 둘째는 그들에게 돌아오려는 동기가 일어날 것이며, 셋째는 지금처럼 그들의 처자식을 사형에 처하면 그들 주변 사람들마저 다 도망갈 것이다. 그러니 무거운 형벌로는 결코 도망자를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조조는 고유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한번은 조조가 감찰을 강화하려고 새로운 감찰관직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는 특정인을 채용하기 위한 대표적인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조조는 이 자리에 노홍(盧洪)과 조달(趙達)을 임명했는데 이들은 전형적인 악질 관료였다. 자신에게 잘보이면 도와주고 잘못 보이면 괴롭혔다. 조조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임명을 강행했다. 악은 악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신념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관리는 무능한 관리라고 여긴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그 아들 르호보암도 같았다. 선왕보다 부드럽게 다스리라고 충고한 원로 신하들의 권고보다 더 강력하게 철권통치하라는 청년 동료들의 건의 중 청년층 건의를 따르다 보니 국가가 두동강나고 실패한 왕이 되고 말았다. 고유는 악을 선으로 바꾸는 ‘이선승지’(以善勝之)를 추구했다(롬 12:21). 그는 무제한적 관용주의자도, 엄벌주의자도 아니었다. 평생을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인정을 베푼 자였다. 언제나 기억할 것은 부드러운 혀(舌)가 단단한 이빨(齒)보다 강하다는 외유내강(外柔內剛) 리더십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