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 스파르타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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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세기경부터 발칸반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도시국가 형태의 폴리스(Polis)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인구가 수천 명에서 20~30만 명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른 폴리스들이 상호 경쟁하면서 성장해 갔다. 본토의 폴리스들이 해외에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 한때 천여 개의 폴리스로 성장한 때도 있었다. 

이들 폴리스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두 개의 폴리스로 세력이 형성되어 갔다. 그것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이다. 이들 두 폴리스는 국가의 성격이 상당히 다르게 성장해 갔다. 아테네는 이오니아인(Ionians)으로, 스파르타는 도리아인(Dorians)으로 민족주의 형태가 다르게 이질화 되어 갔다. 스파르타의 도리아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침략해 그곳 토착민 아케아인들(Achaeans)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웠다. 스파르타의 군국주의는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고스(Lycurgos)로부터 유래했다. 그는 토지균분(土地均分), 귀금속 사용금지, 공동식사 등을 강조했다. 토착민의 반발이 심하자 무력으로 정복해 폐쇄정책을 쓰고, 집단농장을 실시하면서, 토착민을 노예, 즉 헤일로타이(heilotai)로 삼아 억압하고 혹사했다. 집단주의, 전체주의적인 무력지배를 하지 않고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는 군국주의 국가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해 갔다. 초기의 농업사회에서 갈수록 개방화 되어 해외에 많은 시민지를 건설하고 이들을 토대로 해외무역을 활발하게 발전시켰다. 아테네인들에게는 도시를 중심으로 토론문화가 발달하고 합리주의적인 문화가 확대되어가면서 마침내 모순된 것을 개혁해 가기 시작했다. 그런 풍토 속에서 인류 최초로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어 갔다. 특히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 페리클레스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민주정의 틀이 만들어져 갔다. 하지만 소수 지도자의 개혁정신도 중요하지만, 아테네 하부 구조의 데모스(demos)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민주적 시민의식의 성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튼 발칸반도의 실세와 패권 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후세인들에게 어떤 국가가 이상적인 국가인가를 인식해, 두 국가 형태에서 어떤 국가를 모형으로 할 것인가 논란이 되어 왔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은 군국주의 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를 선호하고 주권재민을 강조하는 그런 방향으로 체제를 이룩해 가고자 하는 것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세계사적 추세다. 

세계사의 흐름을 거역하고 독선과 독단으로 이끌어가는 군국주의 국가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력이 약해져 낙후될 수밖에 없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군국주의나 국가지상주의 형태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는 장기적으로 피폐할 수밖에 없다. 한 때 그처럼 강성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 국가는 오늘날 그 존재 가치를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희랍이 포퓰리즘에 빠져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아테네는 희랍뿐 아니라 국제적 중심도시이며, 고전문화와 민주주의 탄생지이며, 동방정교회의 주축국가로서 인류문화의 전통과 유산의 중요한 산실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주장하면서, 스파르타처럼 군국주의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핵무기를 볼모로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유린하는 전제적 독재정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북한은 북한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 지난날의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국가의 숙명을 냉철하게 상기해 보면서 하루속히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민주국가로 변신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있길 소망한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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